추억은 열차를 타고

어느 날, 무궁화호가 데려다준 곳

by 김준겸

오랜만의 외출에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것저것 챙기던 중, 문득 머리를 스치는 불안감. 무언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 이 기분. 그렇다, 기차표를 미리 사두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다 되어서 기차표를 예매하려니 죄다 매진이었다. '미리미리 해둘걸'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별 수 있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차선책은 무궁화호 열차. 물론, 이마저도 입석이었다.


그렇게 무궁화호에 오르게 되었다. 이 열차에 오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 댁을 오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며 열차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없었다. 오랜만에 탑승한 무궁화호에서 익숙했던 무언가가 사라져 있었다. 어린 시절 긴 열차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주던 열차카페가 보이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열차카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직접 열차에서 눈으로 확인하니, 그 빈자리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사정으로 인해 주로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할머니 댁은 전라남도 함평,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잘 모르는 외진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부모님 댁과 할머니 댁을 왔다 갔다 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었던 당시의 나는 그 적지 않은 시간이 무척이나 지루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즐길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나는 그 지루함을 피해 열차 곳곳을 누비고 다녔었다.


특히 열차와 열차가 연결되는 그 연결부는 꽤나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흔들거리는 그 발판 위에 서있으면, 그곳은 하나의 놀이기구였다.


그런 나에게 가장 재밌었던 곳을 꼽으라면 단연 열차카페였다. 정확히 말하면 열차카페에 있는 게임기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억이 맞다면 '스트라이커즈 1945'와 '스트리트 파이터'였던 것 같다. 그 앞에서 동생과 나란히 앉아 스틱을 움직이고 버튼을 누르다 보면, 어느새 열차는 목적지에 가까워져 있었다. 게임 한 판 더하겠다고 할머니 손을 잡아끌던 그 순간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오랜만에 탄 이 열차에서 보인 것은 과거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빠르게만 지나치며 뒤로 스쳐가던 주변의 풍경들. 그것들은 바쁘게만 달려오던 일상 속에서 내가 놓치던 것들이었다. 열차 속의 여유는 나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어릴 적 기억 속 풍경과 닮은 듯했지만, 그 사이엔 분명히 달라진 것들도 있었다. 변해버린 거리, 낯선 건물들, 그리고 그 속을 지나가는 지금의 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는 걸 실감했다.


10년. 벌써 10년이 지났다. 누군가에게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지 몰라도, 내게는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변했고, 또 얼마나 놓쳤을까. 그 질문은 잠시 나를 멈춰 세웠다.


이런 상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준 건 목적지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열차의 안내방송이었다. 그래, 언제까지나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가야 할 곳이 있고, 이제는 떠나야 할 때다. 그렇게 역에서 멀어지는 나의 과거를 뒤로하며, 설렘,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길을 나섰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든 경험을 뒤에 연결해 놓고서 각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처럼,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스쳐가고 있다. 때로는 너무 빠르게, 때로는 아주 조용하게. 하지만 빠르든 느리든, 그 하루를 뒤로 하고 열차는 결국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니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속도로 달려가도 괜찮다. 결국 당신이 선택한 삶의 방향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있을 테니까.


당신의 열차칸에는 어떤 기억이 타고 있으며, 당신의 열차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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