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숨어서 지켜보던 태숙은 자신의 행동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퍼덕이는 심장을 다독였다. 지금은 등교 시간이었고 태숙도 버스로 15분 정도 걸리는 학교에 가야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태숙은 한경여자중학교 2학년 5반의 미화부장이었다. 학기 초에 열린 반장 선거 후보였다가 떨어진 아이들에게 차례로 체육부장, 오락부장, 학습부장, 미화부장 감투를 씌운 학급 임원이었지만 태숙은 내심 미화부장이라 좋았다. 전교생이 36명인 서동국민학교를 대표로 한경읍에서 열린 국민학생 불조심 포스터 대회에 참가했고 나름 그림 실력에 자신 있었다. 그렇지만 중학교에 와서 딱딱한 크레파스가 아닌 흐르는 물감과 물렁한 붓을 사용하면서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동급생은 한경미술학원에 다녔다. 입체감을 표현한 빨강주황노랑 사과가 색이 엉긴 그냥 동그라미가 될 때면 분통을 터졌고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혼자 농사 지어 딸 다섯을 키우는 집안 살림은 넉넉지 않았다.
사실 태숙에게는 5살에 헤어진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버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가 어머니가 아닌 딴 여자와 살고 몇 년째 그를 만난 적이 없었어도 그렇게 굳게 믿었다.
어머니는 태숙과 네 언니 앞에서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할머니가 태숙을 보며 "살 한 점만 더 달고 나왔어도"라고 할 때마다 어머니는 눈살을 찌부리며 불쾌감을 나타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은 비가 오던 여름날 토요일 오후, 영길어머니가 집에 찾아왔다. 태숙은 마루에 배를 대고 숙제인 편지를 쓰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영길어머니에게 미숫가루를 타다 드려야 했다.
영길어머니는 태숙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같은 나이의 아이들을 두고 있었고 두 사람은 허물없이 지냈다. 영길과 태숙은 어려서 소꿉놀이도 하고 친하게 지냈지만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서로가 학교에서 알은체를 않더니 2학년이 지나면서 남보다 못하게 됐다. 학교에서는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가 친구라고 하면 서방각시냐며 놀려대는 통에 태숙은 영길이 보이기만 하면 고개도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청객으로 인해 마룻바닥의 차가운 기운으로 더위를 식히던 태숙은 뽀로뚱해 몸을 일으켰다. "태숙아, 가슴이 제법 나왔네. 시집가도 되겠다" 영길어머니의 시선이 옷 위로 봉긋 솟은 태숙의 젖가슴에 꽂혀 있었다. 태숙은 티셔츠의 끝자락을 확 잡아당겨 가슴을 숨기며 후다닥 부엌으로 도망쳤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아기 얼굴은 그대로인데 2학년이 되면서 가슴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가 부끄러워 태숙은 어깨를 말아 가슴을 안으로 들여 넣고 걸어 다녔고 예전의 평평한 가슴을 그리워했다.
두 어머니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더니 태숙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태숙아버지 소식은 들어요?"
"... 작년에 태화 대학 등록금으로 돈을 보냈어. 서포에서 낮에는 배를 타고 밤에는 이자카야 장사를 하는 모양이야."
태숙은 미숫가루를 타서 두 사람 앞에 내려놓고 바닥에 널브러진 공책과 연필을 챙겨서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편지를 썼다.
아버지께
안녕하세요? 저는 아버지 딸 태숙입니다.
저희는 아버지 덕택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태화 언니 대학 등록금을 보내주셨다고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자신은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적으려다 멈췄다. 아버지라기보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자였다. 아버지가 낯설고 어렵다니 이건 부당해. 아버지를 봐야겠어. 그래 그래야 되겠어.
버스가 떠난 방향으로 고개를 쭉 빼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서 정류장에 다가갔다. 참았던 숨을 내쉬며 안심하려는 순간, 뭔가 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다시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영길이 건너편 길 모퉁이서 울고 있었다. 태숙은 눈을 몇 번 깜박인 뒤 영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영길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때 다가온 버스가 영길을 가리자 태숙은 망설이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서포요"
손에 쥐고 있던 백이십 원을 차장에게 건네고는 덜컹거리는 버스에 흔들거리며 바다가 보이는 쪽 창가로 다가갔다. 매캐하고 더부룩한 냄새가 빠져나가게 창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대차게 들이마시는데 몸이 앞으로 쏠리더니 버스가 멈췄다가 다시 출발했다.
앞 좌석 등받이 너머로 영길이 보이자 태숙은 얼굴을 열린 창문에 대고 못 본체 했다. 하지만 이내 엉덩이가 위로 밀려 올라가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옆자리에 영길이 있었다.
"너 서포 가냐?"
머리를 뒤로 저치고 눈을 감은채 영길이 물었다. 태숙이 말이 없자
"아버지 같은 거 왜 찾으러 가냐?"라고 쏘아붙였다.
영길이 둘 사이의 암묵적인 금지를 깨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과 '아버지 같은 거'라는 말 사이에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영길이 눈을 뜨더니 태숙을 쳐다봤다.
"내가 같이 가줄까?"
영길은 미소 지었고 아주 맑은 목소리로 말했고 태숙은 꼼짝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바다는 창 밖에 펼쳐졌는데 파란 물결은 그녀의 가슴에 일렁이었다. 햇빛 때문임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