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식탁 위에 보리 개역이 있었다. ‘개역’은 미숫가루의 제주어이다. “미숫가루네” 생각보다 반가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텁텁한 뒷맛에 어른이 되어서는 그리 즐기지 않는 미숫가루이었는데 그리운 추억이 많다. 여름에 시원한 물에 타 두었다가 마시는 미숫가루는 즐겨 마시던 간식이었다.
“어릴 때는 이게 왜 그렇게 맛있고 먹고 싶었나 몰라” 언니는 이 말이 우습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옛날에 먹을 게 그것밖에 없었잖아, 지금처럼 간식거리가 풍성했니?”라고 한다.
어린 시절 마당은 늘 보리 차지였다. 보리가 익어 수확하는 시기가 오면 노란 보리 나락을 마당에 펼쳐놓고 말렸다. 어린 마음에 농사일이 고된 줄은 모르고 마당 가득 펼쳐진 노란 보리가 신기해 맨발로 돌아다니며 보리 나락의 감각을 즐기기만 했다.
미숫가루로 어린 시절을 떠올린 언니와 나는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은 미숫가루를 마트에서 사 오면 되잖아. 어릴 때 미숫가루는 어떻게 구했지?”
“방앗간에서 빻아 오지 않았을까?”
언니도 확실하지 않은지 애매하게 말을 마친다.
“근데 뭘 이렇게 많이 싸 줘?”
콩자반, 콩나물무침, 톳나물무침, 고추볶음장, 얼갈이배추, 풋고추 등 혼자 사는 동생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으라고 이것저것 많이도 건넨다. 막내는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가족에게 보살펴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출근하는데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부모님 집에서 나와 직장 근처로 옮긴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다. 마흔을 넘겨 겨우 한 독립이었다. 질겨진 피부와 웬만한 일에 타격도 받지 않는 뻔뻔한 마음새를 지녔건만 혼자 산다고 이런저런 챙김을 주변에서 많이 받는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갔다. 부엌 찬장 안에 흰 비닐봉지에 쌓여 아무렇게나 넣어진 보리 개역이 있었다.
“엄마, 보리 개역은 어디서 났어?”
“동네 삼촌이 가져왔더라, 너 가져가서 먹으려면 가져가라”
“아니” 하고 대답하고 나서 바로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 말이야. 방앗간에서 빻았어?”
“방앗간이 어디 있어? 돌 맷돌이 있는 집에 가서 빌려서 빻아왔지. 너희들 어릴 때 ‘엄마, 엄마, 개역 타먹자’하고 조르면 보리쌀 쪄서 말렸다가 등에 지고 맷돌 있는 집에 가서 갈아왔지.”
어머니는 어린 우리들을 회상할 때면 마치 비 맞은 강아지가 낑낑거리듯 우리가 어머니에게 매달린 것처럼 말하곤 한다. 가난한 시절 궁핍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게 했다고 안쓰럽고 미안해하는 것일까?
농사일은 어머니를 해 뜰 무렵에 집을 나서게 하고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진 마당을 들어서게 했다. 하루종일 일을 해도 수확은 적었고 살림은 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필요한 학용품은 아껴서 동생에게 물려줘야 하고 제때 필요한 돈이 마련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늘 밭에 있었고 비가 오는 날에나 집에 머물렀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이 신이 났다. 집에 어머니가 있을 거라 마냥 좋았다. 어머니가 간식거리로 고구마를 쪄 주기도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거리면 들어줘서 좋았다.
이제 어머니는 늘 집에 있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데 어린 딸은 커서 집을 나갔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기를 더 좋아해서 집에 잘 오지 않는 딸이 되었다.
내가 느꼈던 외로움이 어머니에게 깃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네 마실도 더 자주 나가고 아버지와 그만 다투시면 좋겠고 텃밭에 짓는 농사가 젊은 날 고생스러운 노동이 아니라 소소한 즐거움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홀로 지내는 고독을 즐기고 사랑하듯 어머니도 어머니의 시간을 만들고 즐겼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텃밭에서 가꾼 배추로 담근 김치, 하루종일 껍질을 까며 손질한 마늘, 타작하여 털어내고 볶아낸 참깨를 가지고 가라고 내주고는 딸이 떠나갈 때까지 대문에 서서 손 흔들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