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주의자 앨리스 May 24. 2023

파멸할 수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

레이디 맥도날드 (by 한은형) 감상문

 "운을 쌓지 못했다. 그래서 패배했다"

 김윤자 씨는 어떤 운을 쌓지 못했던 것일까?

 소설은 그녀의 죽음을 기괴하다고 여기며 시작한다. 벤치에 앉아 맞은 죽음. 계절에 맞지 않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치 산책을 나왔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듯 앉아 죽었다. 기괴하다는 직접적인 서술을 읽기 전에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소설에서 이런 죽음은 기괴한 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호기심을 부여하는 장치니까. '아직 기괴한지 정상적인지 알 수 없어, 더 읽어봐야 알지'. 하지만 실제라면 어떨까?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그 안에 담긴 인물의 감정과 생각을 가볍게 넘겨버리지 못하겠다. 모두가 실제인 것만 같다. 모든 게 허구라면 꿈을 꿨다고 여기며 꿈속에서 흘린 눈물을 웃어버리고 안심하겠지만 사실이라면 그러긴 어렵다. 

 '레이디 맥도날드'를 읽기 전에 맥도날드 할머니 영상을 봤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소설을 읽은 후 영상을 찾아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영상을 봤고 읽은 후에 다시 영상을 찾아본 사람이다. 영상이 방영될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심하게 혼란한 시기였고 할머니의 모습에 어떤 감정도 실지 못했다. 그저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을 나오고 돈 잘 벌어서 여유롭게 산다는 법칙에서 벗어난 예외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소설로 다시 만난 김윤자 씨는 달랐다. 

 1940년생 여성이 엘리트 코스를 밟고 전문직 일을 하며 고급 취미를 누리는 삶을 살다가 집도 없고 주변 사람도 없는 노숙자로 몰락했고 그 노숙의 모양이 서울역이나 탑골공원이 아닌 24시간 운영되는 맥도날드라는데 사람들의 호기심이 몰려든다. 비밀을 간직한 삶, 비밀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밀을 캐내려 염탐한다.

 맥도날드에서 밤을 보내는 백발노인 여성,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한 피디가 그녀를 촬영하려 한다. 그녀도 한 때는 집이 있었고 직장이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는 처지로 '자신이 사라진다고 해서 슬퍼할 사람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래도 당장은 죽을 수 없고 길거리 생활에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자제한다. '영어와 일어와 불어로 된 소설을 구해서 읽는 일 같은 것들, 자기 전 이불에 누워 나보코프는 영어로, 카뮈는 불어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어로 읽으며 행복감에 젖'었던 자신을 놓지 않는다. 김윤자 씨의 삶은 그렇게 타인에게 파해져 진다. 그녀는 타인이 사적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방어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렇다면 이것과 저것은 남이 알게 되어도 어쩔 수 없겠군. 하지만 이거랑 이거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을까? 

  누구에게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정신적 경계선이 있다. 나의 경험과 나의 체험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타인에게 파헤쳐졌다. 그러니 그녀의 삶을 들여다본 이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녀의 삶이 불행 포르노로 머물게 하지 않으려면.

  김윤자 씨가 보여준 노숙의 삶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며 자기의 건강과 능력을 돌보는 모습이다. 자신이 누울 자리가 못 되기에 허리를 펴 앉아 밤을 새우며 과한 금액의 후원을 거부한다. 영어를 읽는 기쁨을 놓지 않으려 영자 신문을 읽고 단정한 몸가짐과 매너를 고집한다. 긴 머리를 정갈하게 묶어 올리고 단벌이어도 옷매무새를 고쳐 입는다. 건강을 위해 햇빛이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버터커피를 마신다. 

 다가오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대화, 친밀한 소통이다. 자신의 현재에 위축되어 숨지 않는다. 노숙의 삶이어도 남에게 보여도 괜찮은 모습, 일부러 보여주려는 모습과 감추려는 모습을 스스로 결정한다. 김윤자 씨는 알고 있다, 남의 눈에 뜨거나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공개된다면 단지 불쾌할 뿐인 모습을. 그런 공개는 삶을 무너뜨리는 손실이 되며 존엄성을 상실케 한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옮아 매는 나만의 규율을 지각한다. 안정된 수입이 있어야 하고 쉼을 위한 개인 공간인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소유해야 되고 적당한 사회적 위치와 교제를 누려야 잘 사는 것이라는 기준을 돌아본다. 스스로 규정한 나의 모습이 외적 환경과 기준에서 자유로운지 생각한다. 

 내가 그녀였다면 노숙자 시설인 쪽방에 가지 않기를 선택하지 못했다. 2억의 돈이 남았을 때 방을 구하지 않고 오피스텔에 머물 것을 결정하지 못했다. 나를 잃어버리는 타협인 줄도 모르고 자유 의지를 지닌 결정이라고 믿는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왔기에 나의 기준이 아닌 남이 보기 좋은 기준이 내 삶을 지배한다. 

 김윤자 씨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내적 강박에서 벗어나서 더 큰 독립성을 추구하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삶이 가진 논리와 법칙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을 손에 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안전망을 잃었을 때서야 가능했다. 

  성공의 열쇠와 같이 여겨지는 학벌을 갖췄고 내세울만한 직업을 가졌지만 성공에 다다르지 않은 삶은 실패를 피하려면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알려줄 오답 노트 같다. 하지만 이야기의 외면을 둘러싼 화려한 장신구를 걷어내면 전혀 다른 형태가 나타난다. 노화 또는 질병, 인생의 닥칠 수 있는 모든 불행 앞에서 서서히 소멸의 과정을 밟으면서 독립성을 잃지 않고 친밀감과 애정의 감각을 상실하지 않는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소멸과 종말의 과정에서 맞이하는 고통스럽고 쉽지 않은 경험을 어떻게 하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녀의 삶이 실패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실패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의 중요성을 삶으로 보여줬다. 자신을 포기할 때 그리고 손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비로소 위협이 된다. 설사 어떤 일로 인해서 병이 든다거나 생명의 위협이 다가온다고 해도 그녀는 '나는 이렇게 살 것이며 다른 삶은 원치 않는다'라는 자신을 놓지 않은 것이다. 

 김윤자 씨는 미래를 대비하지 못했다. 영악하게 재산을 불리는데 자신을 소비하지 않았다. 능력보다 여자라는 성으로 취급하는 상사로 인해 자신을 침몰시키지 않았고 소모적인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시간을 좋아하는 일로 채워갔을 뿐이다. 그러다 삶의 끝에 서는 순간, 앞만을 보며 내달려오던 삶에서 뒤돌아 거꾸로 볼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맞았다. 그때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그동안 살면서 자신에게 울타리가 된 어머니와 또 다른 울타리를 만들지 않았음을. 어머니로 이어진 형제자매의 연도 너무나 연약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삶의 방향 전환이 아직 가능한지, 그러기 위해 어디서 용기를 얻어야 할지 탐색하고 삶의 진정성을 찾아간다. 

 극 중 신중호 피디는 김윤자 씨에게 맥도날드 레이디가 아닌 레이디 맥도날드라는 칭호를 주고 싶어 한다. 레이디는 숙녀, 귀부인, 귀족이나 귀족의 아내와 딸을 지칭하는 호칭. 귀족으로 지칭되는 상징은 존엄이다. 김윤자 씨는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존중했다. 타인인 나는 그녀의 존엄을 존중하는가? 그녀의 삶을 기괴한 아웃사이더의 포퍼먼스로 치부하며 조롱하진 않는지 묻는다. 

 그녀에게 닥친 일이 언젠가는 나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안고 미친 듯이 힘써 자산을 늘려야겠다는 결심만이 타인의 자리에서 누리는 혜택일까?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는 이유를 찾고 있다. 노화와 질병으로 다다를 미래는 주변에 사람이 없고 돈이 없고 힘도 없는 늙은이일 뿐이라는 인식에 저항을 해야겠다. 늙고 병들고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도 나의 독립성과 친밀감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않겠다.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지 않겠다. 나만의 한계선을 긋고 타인에 의한 한계선을 거부하며 나를 돌보는 삶을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레이디 맥도날드가 되기로 결심한다. 





작가의 이전글 보리 개역과 어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