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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주의자 앨리스 Nov 04. 2023

두 번째 에세이 책 내기

#과제 2- 입회 동기

 공소 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밭일을 마치고 서둘러 작업복을 벗고 얼굴에 묻은 흙을 고양이세수로 털어내고 나를 챙긴 어머니는 저녁밥도 마다하고 공소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동네 친구들은 술래잡기를 시작했고 어른들은 공소 입구에 서 있는 성모상에 절을 하고 들어서며 인사를 나눴다. 

공소 앞마당은 늘 어둑어둑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아마 해가 질 때까지 일하는 농촌 마을의 사정에 미사 시간을 앞당겼다가 늦췄다 했기 때문이리라.

 동네에서 형님, 삼춘 혹은 어릴 적부터 불러오던 이름을 부르며 쌍욕을 날리며 친근함을 표현하던 어른들은 공소 안에서 자매님, 형제님, 회장님이라 불렀다. 물론 친근하게 데레사, 마리아, 요한이라고 세례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여름이면 무성하게 자란 풀밭 사이로 모기에 뜯기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다녔고 겨울에는 어른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 추위를 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읍내 성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이 도착했다. 신부님은 마을 남자 어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수녀님은 공소 안 재단에 촛대며 제구를 꺼내 미사 준비를 했다. 

 수녀님은 조용히 복사 아이들을 불렀고 그전까지 까불거리며 어울리던 남자아이들은 어른의 엄숙한 분위기를 흉내 내며 수녀님에게 다가갔다. 수녀님을 따라 복사 연습을 하고 나면 장궤틀에 이어진 의자에 앉아 미사가 시작될 때까지 기도를 해야 했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선택된 이들의 특권과도 같아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복사 연습을 마친 수녀님은 이제 나머지 아이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기도문을 암송시키며 사탕이나 스티커를 나눠주었다. 마지막으로 성가 연습을 하고 나면 수녀님과의 시간이 끝이 났다. 

 재단에 불이 밝혀지고 미사가 시작되면 어머니는 면사포와 같은 미사포를 머리에 곱게 얹었다. 세례를 받고 영성체를 하게 되어야 쓸 수 있는 면사포는 여자 아이가 집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어머니 몰래 꺼내 쓰는 보물이었다. 성체를 모시는 어머니를 보며 평소에 먹을 게 생기면 먼저 저를 챙기던 어머니가 성체는 하나도 나눠주지 않는 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무슨 맛일까 궁금했지만 조용한 미사 시간이 끝나면 그 의문도 함께 사라지곤 했다. 

 여름철 미사보다 겨울철이 어린아이에게 혹독했는데 추위 때문이라기보다 깜깜한 밤에 찾아오는 잠 때문이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주변은 어둠에 싸였고 나는 어떻게든 눈을 뜨려고 기를 썼지만 언제나 눈꺼풀의 승리로 이 투쟁은 끝났다. 장궤에 앉아 고개가 떨어지도록 흔들리는 나를 보다 못한  어머니는 결국 편하게 잠자라고 장궤 밑을 허락해 주었다. 

 공소는 나에게 일상과 다른 세계였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게 변했다. 어른들의 옷차림과 말투, 표정도. 학교에서 싸우다 혼나고 시험 성적 때문에 교단 앞으로 불려 나가 매를 맞던 아이도 공소에 가면 특별하게 여겨졌다. 무엇보다 신부님과 수녀님의 존재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어른들과 달랐고 학교 선생님처럼 아는 것도 많았다. 내가 만난 어떤 어른도 신부님과 수녀님처럼 아이들을 대하지 않았다. 함부로 쉽게 말을 걸지 않았고 뭔가 어려운 상대를 대하는 듯 예의를 갖추면서도 그 예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수녀님은 머릿수건과 수도복에 쌓여 신부님 보다 더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머릿수건 안의 머리카락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는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녀님을 봐 왔지만 수녀가 되고 싶다거나 수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금 철이 들어서 주변 눈치를 보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좋아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수녀가 되겠다는 말을 몇 번은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내 장래 희망은 늘 한결같이 선생님이었으니까.


 "수도원에 가고 싶어요"였나, "수녀가 되고 싶어요"였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파비올라 수녀님에게 수도원 입회를 희망한다는 뜻을 내비쳤을 때에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의 말을 내뱉고 나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을 들은 파비올라 수녀님보다 내가 더 놀랐을 것이다. 곧바로 취소하고 싶었지만 내뱉어진 말은 Del 버튼으로 지울 수 없었다. 파비올라 수녀님은 원장 수녀님에게 말하겠다고 했고 나는 말리지 못했다. 

 그 말을 뱉고 나서 입회하기까지 수없이 취소하고 싶었지만 끝내 취소하지 않았다. 입회에 대한 확신이 없어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입회 희망이었다. 2005년 여름 나는 석사 학위를 마치고 허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양학이라는 학위 전공으로 취업 가능한 일자리가 없어 다시 사회복지 전공의 전문대를 야간으로 다니며 낮에는 글짓기 학원, 미술 학원에서 유치원생을 맡아 보육인지 교육인지 명확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사회복지 실습을 하며 연을 맺은 요양원에 취업하고 나서 상담심리 전공의 교육대학원을 야간에 다니며 논문을 쓰고 여름에 졸업을 했다. 뭔가 쉼 없이 노력하고 달려왔는데 맺어진 열매는 없고 또 앞으로 달려야 하는 레이스만 기다리는 삶이었다.  서른 살을 넘겼고 미혼이었다. 그 당시에는 여자 나이 서른이면 결혼 적령기를 넘겨서 앞으로 결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통념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까지 결혼에 마음이 없었다. 나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수도원 입회는 아니었는데. 그 순간 사무실에서 파비올라 수녀님과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고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꺼낸 말이 끝까지 갔다. 


 입회를 원한다고 해서 바로 입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입회 전에 예비 입소자라는 신분으로 수도원에서 하는 피정에 참여하며 정말 입회하고 싶은지 식별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2005년에 저가 항공이 없던 시절, 서울로 가기 위한 항공료가 월급의 5분의 1이던 부담감에도 입회 전에 여름과 겨울, 다시 봄과 여름에 피정을 다녀왔다. 처음 가는 수도회, 낯선 서울 지하철 노선, 제주 촌뜨기는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불편한 일 투성이었다. 인터넷이 지금과 같지 않던 시절, 지하철 노선은 다이어리 뒷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그려 넣어진 노선표를 보고 또 보았다. 길음역 3번 출구에서 수녀님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녀님을 기다리다 지쳐 계단을 올라갔을 때 수녀복 차림의 두 사람이 보였다. 지하도를 올라와서 사람을 찾아야 했다. 아마 출구라고 하면 계단 위 입구라는 무언의 약속이 있겠지, 지하철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런 건 몰랐다. 

 기다리던 수녀님들은 처음 보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세상 귀한 존재라는 듯이. 이런 태도는 입소자일 때 늘 만나는 모든 수녀님에게서 받는 환대였다. 친절, 그 미소, 목소리, 표정, 손짓, 몸짓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지구의 단어는 간단했지만 엄청나게 많은 행동이 담겨있었다. 

 그게 불안에 휩싸였어도 끝까지 갔던 이유였다. 세상의 불친절은 충분히 경험했다. 다니던 학원에서 월급이 떼이고 끝까지 받지 못했고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희망하지 않은 지도 교수의 소그룹 세미나와 워크삽 비용을 착출 당했다. 이미 반납한 도서가 반납이 되지 않았다고 책 값을 물어내야 했고 집 담장에 붙여 주차해 놓은 자가용이 밤새 달팽이 모양의 타원형으로 보닛, 차문, 트렁크, 차 지붕에 낙서되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내 앞가슴을 움켜쥐고 달아났다. 

 수도회에 입회하면 저 친절 속에서 살게 되리라 기대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솜이불에 쌓여 세상의 부조리가 다가오지 않는 장막 안에서 아름답고 평화롭게 살아가리라.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평화를 누리리라. 입회를 말하고 나서 끊이지 않는 불안에 휩싸였으면서도 끝내 입회하게 된 이유는 이것이었다. 


*공소- 본당보다 작아 본당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공동체.

*제구- 미사에 사용되는 성작과 성반 등 도구. 성작은 포도주, 성반은 밀떡이 놓인다. 정확히는 축성된 예수의 몸과 피이다. 자세히 알고 싶으면 천주교 교리를 참고할 것.

*복사- 신부가 미사를 거행할 때 옆에서 돕는 사람.

*장궤틀- 무릎을 끓을 수 있게 되어 있는 틀, 성당 안 신자들이 앉는 의자 뒤에 같이 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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