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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카피 Jun 29. 2022

은퇴 후 짧은 시간,  잔고 0원이 되기까지

사기도 자주 당하면 익숙해진다.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한 그는 나름 업계에서 알아주는 명망 높은 분이었다. 생각보다 순진해서, 쓸데없이 정직해서 모은 것도 많지 않았지만 긴 세월 한 직장에 근무한 덕에 나름 넉넉히 퇴직금을 받았다. 아껴 쓰면 궁핍하게 살지는 않겠다고 위안하며 마지막 직장 문을 열고 나오던 그였다.




첫 번째 그를 늪으로 초대한 곳은 바로 해외 정수기 판매 사업이었다. 알칼리수로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해 준다는 그 사업에 영업 이사로 영입된 그는 일종의 투자금을 내고 정수기 홍보에 열을 올렸다. 사업이 잘되면 인센티브도 높아질 거라는 기대에 집에도 정수를 놓고 주위에도 열심히 알렸다. 기대만큼 영업은 되지 않았고 사업조차 흐지부지 되었다. 결국 투자금마저 날려 먹었다.


처음은 아픈 거라며 소주 한잔으로 쓴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얼마 후 지역의 한 기업 대표가 그를 찾아왔다. 익히 사업 수완에 대해 들어왔으니 자신의 사업을 함께 했으면 한다며 리스펙을 날렸다. 대표를 비롯해 직원 두 명이 다인 회사에 회장으로 들어오시라, 함께 회사를 키우자. 으쌰 으쌰 건배를 하며 이번에도 역시 투자금을 넣었다. 이게 웬걸 다음날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렁이 같은 무모한 믿음을 자책하며 또 잔을 기울였다. 다시는, 다시는 함부로 사람을, 사업을 믿지 않겠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상처가 아물어갈 무렵, 이번에는 묘령의 여인이 홀연히 찾아왔다. 소개를 받고 왔다며 좋은 투자처가 있다며 그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암호화폐 전성시대, 이 파도를 함께 타지 않으면 한 순간에 벼락 거지가 된다며 젊은 애들이 왜 여기에 열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냐며.


@ pixabay


그는 이번에도 아내와 아이들에게 묻지 않고, 그녀에게 따지지도 않으며 선뜻 코인에 털어 넣었다. 로또 당첨번호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기도하며 두배, 세배, 열 배는 될 거라는 희망에 행복했다. 폭락에 폭락을 맞이하기 전까진 말이다. 뭔가 펑! 하고 폭탄 터지듯 그렇게 신기루는 끝이 났다. 너덜너덜해진 통장 잔고를 보며 그는 망연자실했다. 애들을 어떻게 본담.


얼마 남지 않은 돈이라도 지켜야겠다 생각했다. 평생을 피땀 흘려 받은 퇴직금을 이렇게 한순간에 날릴 수는 없었다. 억울한 마음에 잠도 오지 않았다. 등산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에게 상처를 줬던 그 묘령의 여인이 다시 찾아왔다. 염치도 없이 왜 왔냐는 말에 그녀는 코인이란 게 원래 그렇다고, 자신의 탓이 아니니 이젠 정말 돈 되는 신박한 투자상품을 알려주겠노라 했다.


그녀를 곧바로 돌려보냈어야 했다. 뇌는 그렇게 말했지만 가슴은 그녀를 붙잡았다.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투자상품이라며 그에게 남은 마지막 2천만 원을 통째로 투자하기를 권했다. 2천만 원을 투자하고 하루에 한 번 클릭을 하면 매일 40만 원의 수고금이 입금된다는 거였다. 말도 안 된다며 손사레를 쳤지만 그녀는 수익 구조에 대해 집요하게 설득했고 그는 결국 넘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묻지 않은 채.


그 무렵 아버지의 계좌를 관리해주던 딸은 참다못해 오빠에게 사실을 알렸고 아내마저 사태를 인지하게 되었다. 전 가족이 모여 회의를 했고 투자상품에 대해 '사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절대 아니라며 자신의 선택을 믿어달라며 가족들을 설득한 그는, 매일 받게 되는 수고금을 모아 2천만 원이 되면 다시는 이 상품에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긴 회의를 마쳤다.


말이 되지 않지만 그는 매일매일 입금된 수고금으로 2천만 원을 모았다. 그 정도에서 해피엔딩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그 2천만 원을 다시 재투자했다. 고스란히 4천만 원을 투자하게 된 셈. 그리고 그 이후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이후 그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4천만 원에 대한 매일 입금된 수고금을 계속 모았을 수도 있고, 이렇게 좋은 상품이 있으니 지인들에게 소개해 투자를 권유했을 수도 있겠다. 사기의 나비효과는 생각보다 큰 법이니.


어쩌면 지금 그의 통장 잔고는 0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한평생 한 기업의 직장인으로만 살다 퇴직해 너무나도 쉽게, 순진하게 믿어버린 자신을 자책하며 집을 동굴로 만들어 버렸을 수도 있다. 승승장구하던 직장의 임원으로, 한 번도 틀렸던 적이 없는 그의 선택이 손대는 것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상황 속에 그의 상심은 아래가 어디까지인 줄 모르게 추락했다.


외골수라서 그랬다. 자신의 결정이 늘 옳다고만 믿었고 밀어붙였던 그여서 더 그랬던 거다. 가족들과 상의하고 지인들에게 확인하고 간단하게 검색하면 딱하고 나오는 세상에, 대체 그는 무슨 짓을 한 걸까. 비단 그만의 실수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미래일 수도 있다. 앞에 놓은 돌이 걸림돌이 될지, 디딤돌이 될지 만져보고 맡아보고 닦아보고 들어봐야 한다.

@ pixabay




무리한 투자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투자로, 무모한 투자보다 자신에게 유용한 투자로 더 귀를 기울이고 눈을 뜨고 두 팔을 벌려 동료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 투자에 있어 생각을 전할, 의견을 줄, 적극적으로 알아봐 줄 브로가 있는가? 없다면 만들어라. 있다면 더 적극적인 연대감으로 함께하라. 투자에만 좋은 친구들이 아니다. 삶도 더욱 풍성하게 꽃 피워줄 메이트들이다.


그런 브로, 그런 메이트, 당신에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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