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아무것도 모르던 그녀가 비서 입사 면접을 보러 왔다. 항공비서과로 스튜어디스의 꿈만 꾸던 그녀가 교수님의 등쌀에 못 이겨 나온 면접 자리. 면접관인 과장 하나가 유독 톡 쏘는 질문을 하며 공격 아닌 공격을 해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누가 봐도 넌 아니야! 가 한눈에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에이 봐, 안될 거잖아. 안될 거였어.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고 며칠 후 뜻밖에 합격!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그렇게 그녀의 14년의 회사생활의 첫 포문을 여는 날이 왔다. 졸업도 하기 전이었고 사회가 그야말로 새하얀 도화지와도 같은 그런 순간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또 다른 상황의 연속, 어려운 관계 속에서 수차례 때려치우고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이대로 학교로 돌아가 다시 스튜어디스 준비를 하며 진짜 하고 싶었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게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 한 고비 한 고비 넘을 때마다 인생의 허들을 넘듯 올해까지만 올해까지만 하다 14년의 길을 단숨에 걸어왔다. 면접관이었던 과장은 14년을 한 번도 바뀌지 않고 그녀의 직속 상사로 함께 했고 어려움 속에서도 합을 맞추며 지금껏 이어왔다. 이제는 어엿한 임원이 된 그때의 그 과장, 둘이 함께하게 된 자리에서 그녀가 물었다.
"그땐 왜 그렇게 저를 싫어하셨어요?"
입사 후에도 그의 시선은 싸늘했고 그를 위해 정성을 다해 타 준 믹스 커피를 보며 "이상한 거 넣은 거 아니지?" 하며 찡긋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또 한 번 무너졌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고 그렇게 겹겹이 쌓인 감정의 숙제를 묵혀 둔 채 14년의 시간을 이어왔다.
"내가 채용하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었어."
당시 1, 2차로 실무, 임원 면접으로 진행된 과정 속에서 그가 염두에 두었던 친구가 있었지만 임원들의 점수를 합산했을 때 그녀가 우위였고 그렇게 그녀가 최종 자리를 꿰차게 되었던 것. 이제야 관계의 실마리를 하나씩 푸는 순간이었다.
"면접 보실 때 제 이력서 사진, 왜 긁어 찢으셨어요?"
그녀가 입사를 하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부서 창고를 정리하다 입사 서류를 발견하게 되었다. 혹시나 하고 자신의 면접 이력서를 넘기다 발견한 그녀는 기겁하고 만다. 그녀의 사진에 그가 펜으로 긁다 구멍을 낸 자국을 발견했던 것. 속으로 경악하며 덮고 말았다.
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듣진 못했지만 그의 인재상과는 거리가 먼 탓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스스로 위안했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진솔한 대화의 순간이 좋았다. 가슴속 오랜 응어리가 툭하고 터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속 시원히 비워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속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14년 회사 생활의 보람이네 싶은 그런 순간.
"넌 14년이지만 난 23년이야."
오래 근무한 건 알았지만 23년을 한 직장을 다니셨을 줄이야. 23년의 근무 중 14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소스라쳤다. 그리고 둘은 잠시 침묵. 돌아보니 둘은 서로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14년 전 입사 당시 사내에서 가장 '가족 같은 부서'라는 타이틀로 이름 날리던 부서의 둘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타이틀은 유물이 되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둘은 팀장과 팀원, 임원과 팀원이라는 관계 속에 평행선을 유지해 왔다.
그게 이 둘의 관계를, 14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큰 무리 없이 이어온 힘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처음 삐걱거린 오해의 관계를 시작으로 더하지도 덜하지 않은 관계의 유지, 적절한 조언과 코칭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위한 악어와 악어새 같은 포지션을 이어온 셈이다. 알고 보면 가족이 더 조용히 서로를 응원하고 티를 내지 않는 법이니까.
언젠가 그가 그녀의 면접 이력서 사진을 긁어 찢은 이유를 편하게 얘기할 날이 오겠지만 그다지 궁금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성향상 지루하면 가끔 반복적인 낙서를 하기에 생각 없이 긁적이다 살짝 찢어진 것이 아닐까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 큰 의미를 부여할만한 '구멍'은 아닌 듯. 14년의 오해가 그 작은 구멍을 통해 순환되는 밤이었다.
함께했던 밤 풍경
가족과의 관계, 친구, 지인과의 관계, 회사 생활의 관계, 그리고 무수한 순간의 관계들. 그 관계 속에서 우린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까. 혼자 끙끙 앓기도 하고 직진해 확인하기도 한다. 끊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고 더 끈끈해지기도 한다. 수많은 강박 중에서 관계의 강박만큼 스트레스가 또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관계, 평행선을 유지하는 관계로 나도 당신도 함께 좋아하는 관계로도 충분하다. 그 관계만으로도 우린 바쁘고 시간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