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유물 같은 국악이 새로운 봄을 깨우는 순간이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온전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2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고 국악은 오랜 유물이 아니라 새롭게 재해석되어야 하는 우리의 보물임을 알려주었다. 시원하게 펑! 하고 뚫리는 악기와 사람, 소리의 향연 속에서 부산 국악의 힘이 감각과 생명으로 깨어났다.
현재 지휘자가 공석으로 매회 새로운 기획을 엮어가고 있는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은 이번 특별연주회를 부산대 이정호 교수와 준비했다. 국악계에 MZ 교수로 국악의 패러다임을 바꿔가고 있는 이정호 교수는 ARKO한국창작음악제(아창제) 작곡가 선정되는 등 굵직한 필모그래피가 가득하다. 부산대 한국음악학과 교수로 후배 양성에도 여념이 없다. 그런 그의 기획과 지휘로 어떤 공연이 펼쳐질지 무척 궁금하던 차였다.
국악관현악, '그대, 꽃을 피우다'로 포문을 연 본 공연은 수많은 시간, 수많은 사람, 수많은 사건과 사고 속에 꽃처럼 피어난 영웅들의 스토리를 담았다. 힘겨운 시간을 꿋꿋이 이겨내고 결국 해내고야 마는 우리, 우리의 영웅들. 동요 소나무를 주선율로 차용한 2악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음악평론가이자 월간 객석의 편집장인 송현민 씨가 사회로 등장했다. 한마디 한마디 주옥같은 멘트는 소리를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는 모멘텀으로 다가왔다. 부드러운 톤, 정확한 딕션, 따뜻한 봄의 소리로 공연에 더욱 감각과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연주도 연주지만 그의 멘트 순서가 기다려질 지경이었다.
두 번째 곡은 정읍사 주제에 의한 거문고 협주곡 '봄의 정원으로 오라'였다. 행상을 나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담은 백제 가요, 정읍사를 모티브로 했다. 그 봄날, 남편을 향한 따뜻한 마음,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새소리, 그리고 여인의 간절함을 담은 거문고 소리가 어우러졌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여기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온다면 또한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루미의 시 '봄의 정원으로 오라'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감흥까지 한 음도 놓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부산대 한국음악학과 권은영 교수의 거문고 협연은 그야말로 거문고를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였다. 관현악을 압도하는 독보적인 그녀만의 농현, 섬세한 손짓, 몸짓으로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눈을 뗄 수 없었다. 실제 소나무를 흔드는 타악연주자들, 그리고 새소리와 함께 시작된 연주는 봄밤의 그 오랜 그날을 객석에 그대로 재현해 주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과 진윤경 교수의 태평소 협연으로 시작된 태평소 시나위 협주곡 '태평' 또한 태평소의 뻥 뚫린 매력을 과감 없이 전해주었다. 유목민족인 몽골의 악기였던 태평소는 그 허허벌판, 얼마나 장대한 소리를 내어야 했을까. 타악 장단에 맞춰 태평소와 대화를 하듯 주고받는 신나는 무대까지, 국악이 이렇게 신나는 장르였나 싶었다.
매나리토리에 의한 국악관현악 '감정의 집'은 거친 피리의 농음과 해금의 다루 치기 주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크고 작은 강이 갖는 생명력을 기반으로 커다란 집을 상상해 감정의 집이라 표현한 이 연주는 커다란 집 아래 강을 따라 흐르는 선율이 봄의 생명을 더욱 아름답게 깨어나게 해 주었다.
오늘 공연에서 가장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준 '불의 계곡'. 사회자의 한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K-POP의 레드벨벳 '빨간 맛'이 있다면 국악의 바디 '불의 계곡'이 있다. 적벽대전의 그 장엄한 장면 중에 불의 화살이 빗발치는 그 순간을 담은 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순간도 놓칠 수가 없다. 정말 이건 보도 듣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한 상황이다.
영남지역의 국악인들이 전통민속악을 받들고 계승하며 새로운 민속악을 창작하는 목적 아래 2016년 창단한 신민속악회 '바디'. 이 일곱 명의 국악 청년들이 빗어내는 소리란, 진심 국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재목임을 한눈에 알게 했다. 피아노 이창희 씨의 곡인 이 불의 계곡은 바디의 시그니처 곡으로 피아노와 어우러진 국악이 관현악과 어우러지니 무대가 순식간에 적벽대전으로 바뀌어 버렸다.
악기와 하나 되는 연주자를 보면 물아일체가 된다. 악기와 연주자, 그리고 관객인 나까지 모두가 말이다. 딱 그런 순간이었다. 바디,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그리고 객석 모두가 하나가 되어 흥겹게 어깨를 흔드는 그런 순간. 그렇게 바디를 만났고 바디의 팬이 될 것 같다.
마지막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악기인 사람의 소리, 부산시립합창단과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이 함께 이정호 교수의 곡 교향곡 제1번 '별' 중 4악장이었다. 70분 동안 연주되는 곡이지만 시간 상 4악장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인간의 삶을 우주에 비유해 만든 사유의 곡으로 인도의 시안 타고르의 '기탄잘리'에서 가사를 모셔왔다고 한다. 웅장한 연주 속에 부산시립합창단의 더욱 웅장한 소리가 어우러져 폭발했다.
누가 국악이 지루하다고 했던가. 이 공연을 보기 전까진 그런 소리하지 마시길. 국악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어? 국악이 이렇게 신나는 거였어? 국악이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장르였던 거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 또한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이 이렇게 멋진 단체였던 거야? 도 더불어서 말이다. 감정과 세포들이 알알이 깨어나 찬란한 봄 햇살을 맞게 해 준 감각, 생명. 피곤함을 행복감으로 꽉꽉 채워준 시간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