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간의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일정의 해외출장. 그중 9일간의 베트남 일정에 있어 호찌민에 이어 베트남 서부 락지아로 이동하기 전 토, 일 주말 일정은 정비 시간으로 가지기로 했다. 물론 일요일 오후 바로 락지아로 이동이었지만 토요일 하루는 온전히 정비가 가능한 일정. 영상 제작사와 함께한 일정으로 그동안 촬영본을 정리해야 했기도 했지만 다음 촬영을 위한 기획 구상도 꼭 필요한 정비 일정이었다.
그동안의 출장은 출장비를 아껴가며 가성비 콘셉트로 호텔을 잡았었다. 호찌민 동나이성 연짝공단에 위치한 회사, 한국 직원들이 생활하고 있는 기숙사에서 자거나 인근 모텔을 이용했는데 이번엔 촬영팀도 함께 이동하는 터라 인근 모텔을 이용했다. 자다 깨면 벌레가 얼굴을 기어가고 있어 소리를 지르곤 했던 터라 주말 정비 시간만큼은 휴식을 주자는 마음으로 호찌민 롯데호텔을 예약했다.
호찌민 물가를, 부산 물가를 생각하면 하루에 이 가격에?라고 할 수 있지만 룸컨디션도 좋았고 조식도 좋았다. 그래서 돈값은 이런 거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조식을 먹고 그랩(싱가포르에 기반한 차량 공유 서비스 - 일종의 아시아를 커버하는 카카오택시 혹은 우버)을 통해 전쟁박물관으로 이동했다. 호찌민 출장을 몇 번 왔지만 단 한 번도 명소를 가보지 못했던 탓에 이 자체로도 신기한 순간이었다. 그동안 책이나 매체에서만 접해왔던 베트남 전쟁의 현장이 층마다 테마별로 전시되어 있어 충격과 각성이 교차하는 엄숙한 시간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그 깊은 한을 어떡해야 할까 싶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랩으로 사이공스퀘어로 이동했다. 사이공스퀘어는 호찌민의 시그니처라고도 할 수 있는 짝퉁 시장으로 예전엔 몇 개를 사서 선물하기도 했지만 코로나 이후 급격히 높아진 물가로 인해 예전의 그 가성비 가득한 설렘은 사라져 버렸다. 마치 시장조사 하듯 한 바퀴를 돌고 바로 옆에 위치한 일본계 백화점을 돌았다. 신발, 모자, 의류, 섬유를 생산하는 회사에 다니다 보니 지금 생산하고 있는 신발이 이곳 호찌민에서는 얼마에 판매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매장을 돌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점심은 HA KY!라는 현지인들이 더 즐겨 찾는 닭국숫집으로 이동했다. 쌀국수만 생각하다 닭국수라니 그 자체로도 신박했다. 특히나 호치민 마니아인 나로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면과 닭에 대한 선택이 가능한 메뉴판을 받고 가장 많이 주문한다는 메뉴로 주문했다. 와! 그야말로 숙취가 사라지는 마법 같은 국물이다.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아 좀 놀라긴 했지만 4~5천 원으로 간단히 한 끼 해결하기에 딱 좋은 집이었다.
호텔로 이동해 다음 촬영에 대한 구상과 휴식을 한 후 호텔 바로 앞 사이공강을 산책했다. 토요일 오후 호찌민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보낼까 하고 도로를 건너려는데 이건 뭐 이 수많은 자동차와 바이크 사이에서 어떻게 건너갈지 아찔했다. 목숨을 걸고 곡예를 하듯 도로를 건너 만난 사이공강. 리버사이드의 긴 길을 걸었다. 잠시 멈춰 강멍을 때렸다.
슬슬 배도 고파지고 베트남에 왔으니 안마도 받아야 해서 안마를 예약하고 그랩으로 이동했다. 이곳이 한국인지, 베트남인지 도대체 알 수 없도록 한국인들만 가득한 곳이었다. 한국의 인플루언서가 소개하면서 카톡으로 한국어로도 예약이 가능한 곳인 이곳. 타이 마사지처럼 시원한 느낌은 좀 덜했지만 (강도를 중으로 체크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1시간 3만 원의 안마를 받고 저녁 먹을 곳을 찾았다. 베트남에 왔으니 반미는 먹어봐야 하지 않냐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이게 웬일, 웨이팅이 예술인 반미집이 하나 보였다. 검색할 필요도 없이 줄을 서서 맛을 봤다. 회사 공장 앞에선 천 원이면 먹을 수 있는 반미가 3천 원 정도 했지만 받아 들곤 2명은 먹을 사이즈에 기가 턱 막혀버렸다. 반밖에 먹지 못해 남기고 온 반이 아직도 생각나는 맛집이다.
몇 해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의 성지였던 벤탄시장과 데탐 스트리트. 벤탄시장은 아예 저녁에 문을 열지 않게 되었고 데탐 스트리트도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부이비엔 워킹 스트리트가 시그니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안 가볼 수 없으니 걸어서 갔더니 태국 파타야 워킹 스트리트 못지않은 버라이어티함으로 가득했다. 150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스트리트 주점에 춤을 추는 스트릿 댄서들, 곳곳마다 가게로 들어오라는 호객꾼들,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가 완성되는 신기하고도 신비한 체험을 했다. 그래도 갔으니 맥주 한잔은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나마 조용한 집에서 맥주 한 병을 비웠다. 그리고 서둘러 호텔로 쏙 들어왔다. 멍멍한 귀가 쉴 수 있도록...
락지아로 이동하는 날, 오전 잠시의 여유. 이 여유도 가만두지 못하는 난 조식을 일찍 먹고 거기로 나섰다. 호텔 뒤로 걸어가 매인 광장을 산책했다. 호찌민 사람들의 일요일 풍경은 어떨까 싶은 마음에. 아침 8시에 시작하는 버스킹이 또 있을까? 내 눈을,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든 현장이었다. 장장 1시간에 걸쳐 야외에서 펼쳐진 가수 6팀의 노래와 춤 공연. 그야말로 멍 때리며 베트남의 문화를 가득 담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 베트남 걸그룹까지 만날 수 있었으니 매우 매우 러키 한 모닝. 공연이 끝나고 다음 블록으로 갔더니 이게 웬걸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많은 배우들이 세팅을 끝내고 가수 두 명이 립싱크로 노래하는 모습을 드론으로 촬영하는 중이었다. 와우!라는 감탄사가 연발되는 순간!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락지아 이동을 위한 준비를 하며 1박 2일의 호찌민 정비 일정이 끝이 났다. 호찌민에 뭐 볼 게 있겠어하며 지금껏 출장으로만 왔던 이곳. 이번 출장을 통해 휴가 기간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와도 좋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회사 공장이 있는 연짝공단과는 다른 호찌민 1군의 화려하면서도 여유로운 일상들, 이곳으로 내년 꼭 가족과 함께 다시, 여행으로 함께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