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무척이나 빨리 일을 시작했다. 2년제 전문대학의 2학년 1학기 말부터 시작했고 벌써 한 직장에서 14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장기근속했다. 그녀의 14년은 가족과 전쟁을 벌인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남매 그중에서도 둘째라는 이름은 그녀를 지금껏 서러움의 굴레로 꽁꽁 묶어 두었다.
넉넉하지 못한 게다가 너무나도 가부장적인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 그녀, 그녀의 언니는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트러블메이커였다. 서울에서 일하는 언니는 자주 이직을 했고 생활비를 겨우 벌어 썼으며 때론 밀린 월세를 집에 손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둘째인 그녀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고 이번이 끝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14년의 시간이 흘렀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한 건 남동생이었다. 곧 죽어도 남동생이었고 남동생이 그들의 유일한 꿈이었다. 모든 분들의 모든 용돈의 종착지 역시 남동생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유별난 사람은 여지없이 엄마였고 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서열이 그랬다. 남동생> 언니> 둘째인 그녀. 그래서 그녀는 늘 외로웠고 소외당했으며 한편 방치된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 그녀가 번듯한 대기업에 입사를 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놀랐다. 곧 그 놀람은 그녀의 조건 없는 빈번한 희생으로 이어졌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의 지갑은 자동으로 반응해야 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산만한 언니 덕에 아직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은 동생 덕에 그녀는 여기도 저기도 에브리데이 아낌없이 주는 보살이 되어 보시해야 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게 그녀의 숙명인 줄 알았다.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
그러던 그녀는 작으나마 대출을 내 아파트를 사게 되었다. 월세보다는 나으리란 생각에. 그렇게 몇 해를 살던 그녀의 아파트를 어느샌가 엄마가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와 결혼을 생각할 무렵 엄마는 검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는 남동생 주고 남자 친구가 집을 해오라고 해. 남자가 그 정도 능력은 되어야지.
일순 동공 지진이. 소름 끼치는 전율이 일었다. 그동안 바보처럼 살아온 한심한 자신을 자책했고 더 이상 이렇게 살다 간 숨 막혀 죽을 거란 공포가 엄습했다. 때마침 엄마는 그녀에게 살 떨리는 독설을 퍼부었고 그 순간 그녀는 독하게 가족을 손절했다. 상처되는 말들만 골라 그녀를 가스라이팅 했던 엄마의 연락을 차단했고 가족과의 안면을 몰수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아빠의 문자메시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손절을 이어갔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위안했다. 하지만 그건 위안일 뿐 늘 아픔과 그리움이 휘몰아쳤다. 그 무렵 용기를 내어 남자 친구와 엄마를 찾아갔고 엄마 앞에서 펑펑 울며 평생의 아픔을 쏟아 내었다.
앙금이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젠 가끔 전화 통화를 하며 가족 맞는구나, 가족이었어하는 추억을 현실로 만드는 순간을 맞곤 한다. 무슨 구닥다리 꼰대 이야기야?라고 하겠지만 바로 지금 일어난 가까운 우리 이웃의 이야기이자 실화이다. 아직도 여전히 타인보다 못한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에 갇힌 분들도 있으리라.
빠른 손절이 필요하다 본다. 그 손절의 기간 동안 가족 사랑을 확인하며 그래도 가족이니 보고 싶고 다가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게 상호 작용이란 걸 확실히 확인한다면 다시 관계 회복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평생 응어리진 채로 적대감을 가지며 남 같은 페르소나로 살아가느니 잠시라도 과감히 관계를 청산해 버리는 것도 약이다. 그리고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서로를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런 선순환의 관계 회복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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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인 우리가 더욱 가까운 존재가 되기 위해선 생각지도 못한 큰 노력들이 필요하다. 가족이기에 참아야 하고 눈감아야 하며 덮고 못 본 체할게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을 통해 더욱 단단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족이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단단한 사랑을 길게 이어갈 사람들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