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변치 않는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고

by 심풀


소설가로 이름난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를 읽습니다. 떠나간 사람의 글이 남아서 편집본으로 엮어 나올 만큼 글의 힘은 셉니다. 소설가도 에세이를 쓰고 시인도 에세이를 쓰니 반가이 읽습니다. 문학의 영역은 선을 긋고 넘나들지 못할 게 없으니 더욱 기쁜 시선으로 담아봅니다.

❝일전에 시내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의 일이다.(중략) 여학교 시절을 보낸, 지금도 변하지 않은 옛집과 그 앞을 지나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문득 나에게 시간관념의 혼란을 가져왔다.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중략) 그 집과의 만남은 쉰 살 여펜네에게 열여섯 소녀의 감상을 일깨워 줄 만큼 그 집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꿈을 꾸었다.(중략) 시계처럼 산다면 제법 정확하고 신용 있는 사람티가 나지만 시계가 별건가. 시계도 결국은 기계의 일종이거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이 기계처럼 살아서 어쩌겠다는 걸까.(중략)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중략) 소녀적에 살던 집 앞을 지나면서 울고 싶을 만큼 센티한 감정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만 봐도 나에게 꿈을 꿀 희망이 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69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누구나 울고 싶은 충동이나 다시 돌아가 제대로 살고픈 심정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하여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도 그렇게 과거로 회귀하는 주인공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인기가 있나 봅니다.

역사에 이름이 남은 위대한 인물을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한 우리도 나름의 역사가 있습니다.

자잘한 이야기가 나름대로 쌓여있고 오늘의 시간도 흘러가버리면 여지없이 아련한 과거 속 한 페이지가 되어버립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현실에 발을 딱 붙이고 단 한순간도 허황된 꿈조차 꾸지 않는 건조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먹고사는 게 팍팍한 것도 한몫하겠습니다. 스스로 너무 어른이 되어 아무런 꿈을 꾸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루지 못할까 아예 꿈조차 꾸지 않겠다는 애석 하지만 야무진 계산을 하면서요.

❝가끔 무엇을 좋아하느냐라든가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대답을 못하고 난처해하면 먹을 것 중에 무엇, 정치가 중에선 누구 하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줘도 대답을 못하긴 마찬가지다. 싫고 좋고 가 자주 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이 대상에 대해 싫고 좋고 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략)

나는 '넉넉하다'라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넉넉하다'라는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의 가장 궁핍했던 시절과 관계가 깊다.(중략) 밥도 방도 넉넉할 거 하나 없는데 어머니는 부자처럼 넉넉한 얼굴을 하시고 사람들을 먹여 보내고 재워 보내고 하셨다.(중략) '넉넉하다'라는 후덕한 우리말이 사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부자가 늘어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92

'넉넉하다'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습니다. 말도 유통기한이 있는지 어느 시대에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다가 사람들이 자주 입으로 부르지 않으면 스스로 말이 힘을 잃고 사라져 가기도 합니다. 넉넉하다는 말은 주로 어르신들이 주로 쓰십니다. 옷의 품이 크면 넉넉하다고 하십니다. 음식이 먹어야 할 사람보다 많을 때에도 어르신들은 넉넉함을 강조하십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은 딱 맞게,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정도를 희망하는 듯 보입니다. 남으면 골칫거리, 모자라면 아쉬우니까요. 자로 잰 듯이 딱 맞춰서 필요한 만큼만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합리성을 기초로 한 이성적 판단이 우선하는 경향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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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개망초 꽃이 마치 안개꽃처럼 이쁩니다. 길거리 어디서나 만나는 평범하고 값어치 없는 그 꽃인데 말입니다. 여럿이 한데 모여 피어나니 꽃집에서 사고파는 꽃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홀로 피어있다면 눈길을 사로잡지 못하고 스쳐 지나쳤을 겁니다. 마치 정성 들여 심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가장 흔한 꽃을 보고도 장미꽃 백 송이를 받은 것처럼 크게 감탄할 수 있습니다. 마음 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꽃을 보고, 책과 글을 읽어가야겠습니다. 넉넉한 마음을 잊지 말고.

❝여행이나 소풍을 갈 때 카메라를 안 가지고 다닌 지는 아마 10년도 더 될 것이다. 찍는 것이 시들해지면서 사진을 분류해서 앨범에 붙이는 일도 안 하게 되었다.(중략) 마주 엎드려 그림책을 보고 있는 할머니와 손녀가 있는 사진은 당연히 아름답고 평화롭다. 그런데 왜 아름다움에는 비애가 뒤따른 걸까. (중략) 장대 같은 아들을 잃고 지옥 같은 고통에 지쳤을 때 겨우 콩 꼬투리만 한 새 생명이 기적처럼 나에게 왔다. 그 새 생명을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는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176

작가(박완서)는 사고로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글까지 내려놓은 순간을 거칩니다. 외손주를 품에 안고 새로운 희망의 싹을 봅니다. 생명의 허망한 엇갈림을 견디는 것은 그와 같은 무게의 생명으로만 채워질 수 있나 봅니다. 작고 연약한 생명의 힘은 스스로 시들어가는 사람의 삶을 찬란하게 만드는 기쁨을 전해주니까요. 하여 생명의 순환은 비할 데 없이 축복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사진을 찍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아이고, 난 안 찍으련다. 나 죽으면 니들이 사진 치우기도 힘드니께. 다 늙어 빠져서 뭔 놈의 사진이냐"

살아있는 지금, 죽고 나서 까지 걱정을 미리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한 해가 지날수록 더욱 사진을 멀리하는 모습입니다. 나이를 먹고 변해가는 외모가 탐탁지 않은 심정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흰머리에 늘어가는 주름살을 환영하는 마음이 쉽게 드는 것은 아닐 테니 어쩌랴.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중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아무런 용훼容喙를 불허하는 완벽한 정의를 하나 가지고 있고 싶어서 조바심한 적이 있다. 그 시기는 내가 소설을 쓰고 나서 훨씬 후였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부터 썼다는 걸 숨길 수 없게 된다.(중략)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중략) 나의 어렸을 적,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중략)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서 이야기를 졸랐었다.(중략)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의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효능의 꿈을 꾸겠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206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썼다는 작가(박완서)의 고백이 더욱 놀랍습니다. 몰라도 그렇게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말입니다. 뛰어난 이야기꾼인 어머니의 영향력이 실로 엄청납니다. 어머니의 재능이 그대로 작가에게 옮겨진 듯합니다. 작가의 소설가로서 재능은 어쩌면 어렸을 적부터 이미 움트고 있었으리라.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이 씁니다. 어떤 장르든 독학하듯 책은 최고의 선생님이자 친구로 두고서. 책과 글쓰기를 곁에 두고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배울 것이 많다고 서두르자면 걷는 듯 뛰어도 모자랄 듯합니다. 그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봐야겠지요.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자신만의 발걸음에 맞춰서 멈추지 않고 가장 느린 듯 꾸준히.

비를 품은 검은 구름이 앞 산언저리에서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어요. 아침 열기를 뺀 시원한 바람이 모내기한 논의 벼들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는 평화로운 모습이 눈에 띄고요. 불어오는 여름 향기에 실어 보내요. 진심에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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