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아버지가 일 년 만에 책을 읽으셨어요.

금일기

by 심풀

2025년 1월 9일

날씨가 얼었어요.

사정없이 불어닥치는 찬바람이 겹겹이 입은 겨울옷을 단숨에 뚫고 들어와요.

마치 서너 겹 거추장 한 옷을 입고도 냉탕 안에 들어간 심정이 이럴까 싶어요.

그 와중에 동네 뒷산 하늘은 왜 이리 맑고 청량한 지 추위를 모르는 하늘빛에 놀라 혀가 굳어버렸나 봐요.

먹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위에 하얗기만 한 구름 몇 조각이 겨울인지 모르고 혼자만 곱고 또 아련해요.

누렁이에게 점심밥을 가져다주기 위해 마당을 가로 질러가야 해요.

집 모퉁이를 돌아서면요.

한 덩어리 얼음 품은 바람이 이때다 싶게 몰려들어요.

어이쿠, 옷 밖으로 삐죽이 내민 맨손이 금세 곱아져 제 맘대로 펴치지 않기도 하고요.

밖에 몇 분만 서 있어도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고 시리기 일쑤에요.

이 추위에도 누렁이는 나 몰라라 꼬리를 흔들며 제 밥을 반기기 바빠요.

누렁이는 이름 그대로 누런 털을 온몸에 둘러싸여 있어서 한 겨울 찬바람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가봐요.

'이럴 땐 개 팔자가 최고네. 밥 갖다 바치고 추위까지 모르다니.'

부러운 개 팔자가 따로 없지요.

짤딱막한 꼬리까지 좌우로 연신 정신없이 흔들어 대면서 밥그릇에 쏟아지는 음식 세례에 기쁜 기색이 역력해요.

사계절, 밥투정조차도 없는 순하고 착해빠진 시골개 누렁이에요.

아픈 아버지가 점심 식사를 하신 후 평소처럼 텔레비전에 빠지시길 줄 알았어요.

그만큼 날마다 식사 후에 유일한 소일거리이기 때문이었어요.

한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소파 아래에 나뒹굴고 있던 『명심보감』을 주섬주섬 꺼내 보내시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환호성이라도 한바탕 냅다 지르고 싶었지요.

"아버지! 이제 정신이 조금 나셔요?

책을 읽고 싶으셔요?"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 모습을 눈을 비비면서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얼떨결에 맞은 휴일처럼 환한 웃음을 머금었지요.

어쩐지 이 순간을 놓치면 후회를 잔뜩 할 것 같은 기분이었고요.


책 읽고 있는 아버지^^

불현듯 이층에 놓아둔 핸드폰을 챙겨와야겠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하였어요.

핸드폰을 들고 화분 뒤에 서서 멀찍이 아버지의 책 읽는 사진을 몇 장 티 나지 않게 살그머니 찍어두었고요.

아버지는 아예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채 온통 책에 정신을 빼놓고 계신 거예요.

'아! 얼마 만에 만나는 아버지의 맑고 고운 모습인가.'

못해도 일 년, 아니 일 년도 넘은 듯해요.

어림잡아 헤아려 보기도 까마득할 만큼 낯설고 그리운 자태였거든요.

눈 뜨면 밥과 텔레비전만 끌어안고 살던 아버지이셨건만 거짓말처럼 손때가 묻은 아버지의 책을 손수 집어 들고 읽고 계시다니.

어쩌면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느냐며 곧이듣지 않아도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니까.

아버지의 이 모습, 눈물 너머 웃음을 불러오는 기쁜 흔적을 이렇게 남겨두어야 하겠어요.

아버지의 책 읽는 사진은 귀하고 귀한 그림인 동시에 유명한 명산의 풍경처럼 그저 감격스러워요.

아버지가 어떤 책을 어느 구절을 얼마나 읽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텔레비전만 멍하니 바라보던 아버지에서 책 읽는 아버지까지.

두 아버지의 모습은 같은 듯 너무 달라요.

보는 눈을 의심케 하고 나아가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어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쉬운 기색 없이 오로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본 적이 언제였는지요.

아버지가 책을 읽고 있는 사진은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어요.

근래 만나보지 못한 시간이 꽤 길었기에 더욱 반가운 것이고요.

"아버지, 공부 열심히 하시네요."

흑임자 깨죽을 데워서 내어 드리면서 속엣말이 준비도 없이 술술 흘러나왔어요.

엄마는 농사일 없는 겨울철, 아이들 학교에 가득 아침 열 시쯤이면 영락없이 동네 회관으로 나들이를 가셔요.

점심을 회관에서 잡수시고, 엄마는 어스름한 저녁에나 집으로 돌아오시거든요.

직접 눈앞에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이 기쁜 사진을 자랑스레 보여드려야겠어요.

혼자 보기엔 아까운 고마운 아버지의 모습을 글에 담아 놓아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쁜 소식을 적어 놓는 날이 오네요.

아무리 찬 바람이 지붕을 들썩이면서 겁을 잔뜩 주어도 오늘 마음의 날씨는 맑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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