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木浦), 굴곡의 역사를 담다

건축 & 도시 이야기

by hesed by



# 목포를 향하다.


기분 좋은 새벽녘 어스레함과 약간의 서늘함이 뒤섞인 아침 6시경, 난 목포행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여행에 있어서는 다분히 계획적인 스타일인 나는 7시 출발 버스에 맞춰 여유 있는 시간에 터미널에 미리 도착하였고, 무사히 목포행 버스 15번 창가 좌석에 안착했다. 창문을 가리는 것도 없고, 자리도 뭐... 아주 편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버스 여행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별 상관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한다는 감흥이 내 마음을 설렘으로 뒤덮어 약간의 불편함이나 어려움 따위는 웬만해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여행은 참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어쨌든 편안함과 안도감으로 출발한 지 5분 후, 나에겐 바로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버스 앞쪽 운전기사님 오른쪽 머리 위에 행선지를 알려주는 전광판이 반짝거리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인천→진도행 버스라는 선명한 네온사인이 보란 듯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내 머릿속에는 "난 분명히 목포행 버스를 탔는데" 하는 혼란스러움과 당황스러움이 찾아왔다. 난 무언가에 홀린듯하여 기사님께 큰소리를 내어 물어볼까 하는 욕망도 잠시 일었지만, 아침잠을 깨우고 나와 이제 막 버스의 푹신하고 달콤한 의자에 몸을 던진 승객들의 고요를 깨고 싶지 않아서 그냥 참기로 했다. "뭐 진도로 가면 좋지. 진도도 가보고 시간 되면 목포도 가보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고쳐 잡고 기분 좋게 차창 밖 풍경으로 눈을 돌리고 있을 때쯤, 기사님의 상냥한 안내 멘트가 나의 혼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내가 탄 버스는 목포에 손님들을 내려 주고 진도까지 가는 버스였던 것이다.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괜한 머쓱함이 올라왔지만 내 기분은 최고조를 치닫고 있었다.


목포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고, 뭐 굳이 잠을 청할 정도로 졸린 것도 아니라 책을 펼쳐댔다. 나는 작가의 위트 있는 문구에 웃음 지으며 때로는 감동적인 문구에 밑줄을 그어대며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이렇게 책에 푹 빠져 있을 때쯤, 나는 버스 안내방송에 움찔하며 눈을 떴다. 어느샌가 나는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단지 몇 페이지 안 되는 책의 힘이 날 숙면으로 이끌다니... 이래서 어디 작가로서 제대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머쓱한 기분을 뒤로하고 차창 밖을 바라보자 밤새 내린 약간의 눈으로 덮여 군데군데 새하얀 산과 논밭의 풍경들이 눈부신 햇살과 어우러져 날 편안한 표정으로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풍경들이 내 곁을 빠르게 스쳐가며 버스는 어느덧 목포에 다가서고 있었다.



# '목포'(木浦)의 유래


목포는 1897년, 대한제국 시기 일본의 요구에 의해 개항되면서 근대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목포에 대거 진출하여 상업, 무역, 그리고 토지 개발을 주도했고, 일제강점기 동안 목포는 일본의 식민지 경제 정책에 따라 농산물과 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일본은 목포를 근거지로 삼아 한반도 남부와 만주, 일본 본토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개발했는데, 이 시기 목포에는 일본식 건물과 시설들이 많이 지어졌고, 이들 중 일부는 현재도 남아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 목포에서는 항일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목포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 중 하나였으며, 특히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목포는 아직도 그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에게 아픔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한다.


'목포'라는 이름은 한자로 '木浦'로 표기하며, '나무가 많은 항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목포는 원래 '물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목포(牧浦)'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이 지역은 예로부터 강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로서 어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충실히 기능해 왔다.


#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현 오거리 문화센터)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외관


목포역을 지나 근현대 거리로 들어서면 '코롬방 제과점'이라는 유명한 빵집이 자리하고 있다. 배도 출출하고 해서 유명하다는 새우 바게트를 하나 사서 입에 물어 넣었다. 허기 탓인지 정말로 유명세에 걸맞은 제빵 실력 때문인지 어쨌든 빵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그 맛은 별미였다. 뭐 빵집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코롬방 빵집 옆에는 그 외관도 독특하고 아담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한눈에 봐도 우리나라의 양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일본풍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색적인 건물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바로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이라는 이름도 생소하고 외관도 생소한 건축물이다.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원래 1898년 처음 세워졌는데 목포심상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목포 내에서 일본인 소학교로 최초로 정식 운영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인 학생 수가 점차 늘어가면서 1904년 현재 위치의 부지를 매수하여 1905년 목조 단층 사원으로 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석조건물의 정확한 신축 일자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인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1930년 초에 건물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석조로 재건립된 이 건물은 그 후 일본 사찰 법당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이후 정광사의 관리를 받았으며, 1957년부터 2007년까지는 목포중앙교회로 사용해 온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이한 이력은 1970년대 반유신 운동과 1980년대 5.18 민주화 운동 그리고 6.10 민주항쟁운동 때에는 국민운동본부 목포시 지부로 활용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현재는 건물 내부를 전시, 문화 시설로 활용하고 있지만, 사찰이 교회가 되고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장소로도 활용된 특이한 건물의 역사는 그 외관만큼이나 독특하게 다가온다.


건축적인 특징을 조금 살펴보면, 장방형의 단층 건물로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데,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사용한 팔작지붕으로 지붕의 각도가 꽤 가파르다. 일본 건축 고유의 특징 중 하나가 그대로 나타난 것인데, 이유는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외관은 석재를 이용하여 일본 목조 불당의 건축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내부



#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외관


목포 근현대 거리에는 세월과 역사가 절로 느껴지는 건축물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일제의 수탈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지만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축물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역사의 현장이다.


'호남은행'은 지역의 대부호들이 일본 자본에 대항해서 1920년 광주에서 만든 민간 자본 은행으로, 당시 일제 총독부는 일본 자본의 은행들에 맞서 맥을 이어가는 민족자본 은행들을 눈엣가시로 여겨 1928년 새로운 은행령으로 민족계 은행의 통합을 강요했다. 그러나 호남은행은 총독부의 통합 조처에 순응하지 않고 1929년 목포지점 건물을 신축하였고, 당시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을 의식하여 규모와 외관에서도 손색이 없도록 건축하였다. 개항 도시 목포의 산업자본 형성에 기여한 바가 큰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일제 강점기 은행의 역사와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주는 바가 크다. 이후 일제 식민지 금융 정책에 맞서 독자적으로 운영을 하다가 1942년에 동일은행과 강제로 통합되었고 이후 조흥은행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의 출입구 현판에는 한 가지 결연한 사연이 들어있는데, 한자로 새긴 현판의 ‘포(浦)’자에서 오른쪽 획(′)이 없는 것이다.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설립자가 ‘목포지점이 번창한 다음에 찍겠다’라며 일부러 찍지 않았다는 설과 둘째는 ‘일제로부터 독립한 다음에 찍겠다’라며 글자를 완성시키지 않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사실 여부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일제의 자본침략에 맞서 민족자본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건축적인 특징은 전체적으로 수직성을 강조한 단순한 형태의 입면이지만, 2층 벽면 위쪽의 돌출된 문양과 처마 지붕 아래의 돌림띠 등으로 입면에 변화를 주었다. 타일마감, 정면 출입구 석조 마감 등에서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근대 개항도시 목포에 현존하는 유일한 근대 금융계 건축물로서 가치가 높은 근대 문화유산이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출입구 현판 (좌) / 외벽 디테일 (우)



# 구 목포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강당 외관


목포 근대화 거리를 거닐다 보면 유달산 밑에 자리 잡은 '유달 초등학교'를 만나게 된다. 1945년 설립된 유서 깊은 학교로서 그 뿌리를 찾아가 보면 1929년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해 세워진 '목포 공립 심상소학교'를 만나게 된다. 목포공립심상소학교는 1897년 개항 후 일본인들이 대거 목포로 들어와 살면서 일본인 자녀들을 위해 설립한 학교인데, 교문 옆에는 당시 국기 게양대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일부 개수된 곳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을 많이 갖추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목포지역의 유일한 일제강점기 초등학교 교육 시설이라는 데서 역사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건축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건물 외벽의 정면과 좌측면을 타일로 마감하고, 건물 하단부가 구분되게 석재를 별도로 사용했다. 그리고 타일 마감인 전면부와는 달리 후면은 콘크리트에 하얀색 도장 마감으로 되어 있으며 출입구의 캐노피도 보이지 않는다. 목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초등 교육 관련 건축물로 가치가 있는 이 건물은 근대 강당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강당 출입구 (좌) / 외벽 디테일 (우)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국기 게양대


#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


목포 심상소학교 (현 유달 초등학교)를 지나 번화로 길가로 들어서면 눈에 띄는 일본식 가옥들을 몇 채 만나게 되는데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1,2,3'으로 명명되어 오늘날까지 그 시대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1,2,3'은 세 곳 모두 다 후쿠다 농업주식회사의 사택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광복 후에는 한국인이 거주하며 온돌을 설치하고 내부를 변경한 이력도 있어 한국 주거 건축사에 의미 있는 사료로 남아 있다. 그리고 유달 초등학교 앞에는 가장 규모가 큰 '목포 영산로 일본식 가옥'이 자리 잡고 있는데 1층과 2층의 지붕 형태가 각기 다른 형태로 꾸며져 있는 특징이 있다.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1 & 2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3 / 목포 영산로 일본식 가옥


# 구 목포 부립 병원 관사


구 목포부립병원의 원장의 관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식 고급 주택이다. 구 목포부립병원의 흔적과 기억, 당시 상류층 일식 주택의 건축 형식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라 평가된다. 건축 연도는 1935년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구전으로는 1920년대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집의 최초 소유자는 '목포 해운 회사', '조선 제유 회사', '태평 양조', '목포 소주 판매 회사' 등에 참여했고, '전남 비료 회사'의 대표를 지낸 일본 상인 '모리타 센스케(守田千助)' 이다. 해방 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해군기지가 되면서, 이 집은 해군 관사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1966년부터는 개인 소유가 됐다고 한다.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은 근대건축물로 2층 구에 일본식 기와로 된 복잡한 지붕 구조가 특징이며 내부 마당에는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다. 현재는 카페로 리모델링 후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으니 한 번쯤 방문해 보면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을 듯하다.

구 목포 부립병원 관사의 입구와 전경



# 구 목포 일본 기독 교회


'구 목포 일본 기독교회'는 1922년 9월 준공되었고 1927년 6월 한차례 증축된 일제 강점기의 건물인데, 일본인들이 예배를 드린 기독교회이다. 목포 기독교의 선구자인 윤치호와 결혼하여 목포 사회복지시설 '공생원'을 운영하였고 그 공로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훈장을 받은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 여사가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이다. 과거에는 전면부가 종탑 형식의 2층 석조 구조로 되어 있으나 현재는 상부가 없이 1층만 남아있는 상태로, 근대기 동양척식주식회사 주변 시가지의 흔적과 기억을 담고 있어 당시 일본교회의 건축 형식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다.

일본 기독교회 정문 (지금은 폐쇄되어 있어 내부는 볼 수 없다)



# 소년 김대중 공부방


목포 만호동 목포진 역사공원 근처에는, 193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소년 시절 공부했다는 공부방이 있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공부할 당시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고 여러 번의 리모델링과 변천을 거친 건물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과 그 시절 공부의 흔적들을 만나볼 수 있으니 꽤나 인상 깊은 장소이다.


공부방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짧은 경구가 유독 눈에 들어오는데, 한 번쯤 방문해서 이 시대의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누군가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것도 인생의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다.


공부방 전경과 입구


공부방 책상과 창문 밖 풍경


공부방에 걸려 있는 세계지도와 성적표



# 다사다난한 역사, 목포


목포는 참으로 이야기가 많은 곳이라, 그 모든 것을 담기에는 한 번의 여행으로는 너무나 부족한듯하다. 그야말로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우리의 아픔과 극복의 역사가 서려 있는 장소이다. 그리고 건축적 보존 가치가 높은 여러 근현대 건축물뿐만 아니라, 유달산의 풍경이 있고, 시화마을의 정겨움도 느낄 수 있으니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바란다.


유달산 전경


목포 시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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