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역사&인문 이야기
시청역을 나와 덕수궁 정문을 끼고 돌담길로 들어선다. 주말이면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지만 덕수궁 돌담길의 정취는 여전하다. 그리고 시작되는 정동길!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흥얼거리며 살아온 세대에게는 가사 속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정감 어린 길이다.
'정동'(貞洞)의 유래를 잠시 살펴보자. 정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에서 비롯되었다. 태조는 왕비의 능을 도성 안인 현재의 정동에 조성하고, 능의 이름에 '정숙하고 곧은 덕'을 기리는 뜻으로 '정'(貞) 자를 붙였다. 이후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릉은 현재의 성북구로 옮겨졌지만, '정릉동'이라 불리던 이 지역의 이름은 그대로 '정동'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름 그대로 '정숙하고 곧은 동네'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정동거리'라고 하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제일교회와 이화여고로 이어지는 거리를 가리킨다. 개화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건축물과 문화 유적들이 남아있어, '근대 유산 1번지'로 불리우며, 1999년에는 서울시에서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는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만큼 아름답고 친숙한 거리이다.
정동 거리는 한국 근대사가 압축되어 고스란히 새겨진 공간이다. 1883년 미국공사관이 설치되면서 정동은 한국 최초의 외교관구로 자리 잡았는데, 이후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열강의 공사관들이 연이어 들어서면서, 이곳은 조선 말기 격동의 외교무대가 되었다. 특히 1895년 '을미사변'과 1896년 '아관파천'은 당시 조선이 처한 절망적 상황과 함께 정동이 갖는 외교적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정동은 조선의 전통과 서구 근대문명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그야말로 역동적인 무대였던 것이다.
정동은 또한 한국 근대 교육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과 '배재학당'(현 배재대학교)은 한국 근대 교육사의 출발점이었다. 특히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이화학당의 설립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정동제일교회'(1898년 설립)는 한국 개신교의 모태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서구 종교의 전래와 확산 과정에서 정동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는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서구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또한 정동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극장인 '원각사'(1908)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전통 연희에서 근대 연극으로의 전환점에서 정동은 문화적 근대성을 실험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생활사적인 측면에서도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1902)이 들어서면서 서구적 생활양식의 도입을 주도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길을 거닐다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서울과 같은 대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거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동적인 인상으로 다가오지만, 정동에는 유난히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다. 정감 어리고 손때 묻은 붉은 벽돌과 가로수의 짙푸른 녹음과 푸르고 맑은 하늘빛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지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동길에는 왜 이렇게 붉은 벽돌의 건축물이 많을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거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는데 이야기를 한번 이어가 보자.
19세기말, 서구 열강의 공사관과 서양 선교사들이 정동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건축 기술이 함께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정동 일대는 궁궐과 일부 사대부 집을 제외하고는 초가집 일색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에서 온 선교사와 건축가들은 한국에서 표준이 될 만한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마땅히 발견하지 못하였고, 이에 당시 서양에서 널리 사용되던 -특히 영국의 빅토리아 양식- 붉은 벽돌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규격화되어 있어 시공이 편리하고 내구성도 뛰어난 붉은 벽돌은 실용적인 장점 외에도 당시 사람들에게 '근대화'와 '새로운 문명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붉은 벽돌 건축물은 '정동제일교회'와 '러시아 공사관'을 들 수 있는데, '정동제일교회'(1897년)는 붉은 벽돌을 사용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다. 또한 '러시아 공사관'(1890년) 역시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붉은 벽돌 건축물로 지어졌으나, 6.25 전쟁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탑과 일부 지하층만 남아 있어 붉은 벽돌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후 정동거리의 건축물들은 주로 붉은 벽돌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정동 거리는 오늘날 붉은색의 물결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단순히 친근하고 아기자기하게만 느껴지던 붉은 벽돌들은, 사실 단순히 건물을 짓는 재료를 넘어,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려 했던 역사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산이다.
건축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동 거리는 전통 한옥과 서양 근대 건축이 공존하며 새로운 절충양식을 창조한 실험적 공간이다. 정동의 초기 서양식 건축물들은 본국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이식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는데, 러시아공사관의 르네상스 양식, 영국공사관의 빅토리아 양식 등은 각국의 건축 전통을 조선 땅에 그대로 옮겨놓은 사례들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정동제일교회는 붉은 벽돌의 고딕 양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덕수궁은 전통적인 궁궐 건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전이 공존하는 독특한 궁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식 과정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한국의 전통 요소를 도입하여 서양의 원형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발전시킨 중명전(러시아 고전주의와 르네상스 양식과 한국 전통 양식의 혼합),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로마네스크 양식과 한국 전통 양식의 혼합)과 같은 건축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의 기후적 조건이나 재료의 제약, 시공 기술의 한계 등의 원인도 있겠지만, 단순한 모방이 아닌 적응과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정동길의 개략적인 역사와 건축 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정동길과 주변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들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고, 각각의 건축물들에 관련된 건축양식, 심미성, 기능성 등 건축적 관점뿐 아니라,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건축물에 얽힌 히스토리를 들여다 봄으로써, 조금은 더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참고로 정동거리에서 둘러보면 좋을만한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추천드리니 참고하시라!
정동제일교회
구 러시아 공사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구 배재학당 동관)
구세군 중앙회관
이화여고 이화박물관 (구 이화여고 심슨 기념관)
구 신아일보 별관
서울시립 미술관 (구 대법원 청사)
중명전
덕수궁 (석조전, 돈덕전 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서울특별시 의회본관 (구 경성부민관)
국립 정동극장
국립 정동극장 세실
경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