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이야기
서울은 우리에겐 축복이다. 늘상 우리 곁에 있기에 그 소중함과 가치를 잘 느끼지 못할 뿐이지, 사실 서울은 한성백제시대와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까지 더하면, 무려 1100년이 넘는 기간이나 수도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천년도읍이다. 그 역사들이 켜켜이 쌓인 서울의 모습은 마치 만고의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지층의 단면과도 같이 느껴진다.
오늘 소개하고픈 덕수궁(德壽宮) 역시 서울의 켜켜한 역사의 지층 속에서 한 켜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수많은 이들의 휴식처요 또한 누군가와 사랑을 속삭이던 공간으로 그 기억이 가득한 덕수궁을, 오늘 우리는 한때 그곳의 주인이었던 고종(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1852년~1919년)의 삶과 함께 따라가 보고자 한다.
덕수궁의 출발은 본래 궁궐이 아니었다. 간략히 그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 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 주었고, 이후 한 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비로소 궁이 되었다. 그 이름 또한 당초는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이었는데,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여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는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 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고, 그나마 1904년에는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중건하였다. 그리고 '덕수궁'이라는 오늘날의 궁호를 얻은 것은 순종이 즉위 한 이후이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덕수궁은 사실상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고 궁역이 대규모로 축소된 형태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수대비의 삶과 비운의 월산대군, 그리고 그 평가가 다를 순 있으나 도성과 백성을 버린 왕으로 기억되는 선조와 대한제국의 큰 꿈을 품었지만 시대의 멸망을 지켜본 고종황제의 한이 서린 곳이니 그 아픔이 참으로 절절히 배어 있는 곳이다.
지금은 덕수궁의 정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대한문(大漢門)'은, 사실 원래의 이름도 아니요, 원래의 위치도 아니요, 원래 정문도 아니었다. '대한문(大漢門)'의 원래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요, 그 위치는 당초 자리보다 30m 정도 안쪽으로 들여진 것이요, 원래의 정문은 '인화문'이었다.
먼저 이름의 변화를 살펴보면, 원래 이름인 대안문(大安門)은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는 기원을 담았으나,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재건 과정에서 고종의 어명으로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의미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변경되었다. 항간에는 여러 가지 낭설이 떠돌지만 사실 그 이유는 지금도 명확지 않으며, 왠지 그 의미가 축소된 것 같아 다소의 아쉬움은 남는다.
다음은 위치인데, 지금 위치는 당초 자리보다 30여 미터 안쪽으로 이동된 것으로, 대한문이 처음 밀려난 건 1910년대다. 일제가 태평로 공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대한문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고, 1968년에는 도심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대한문과 연결되어 있던 좌우 담장이 헐려 도로 옆에 대한문이 섬처럼 외로이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덕수궁에는 원래 남쪽을 향하던 '인화문'이라는 정문이 있었는데, 그 방향의 도로가 협소하여 자연스레 '대안문'의 사용도가 높아지자 자연스레 덕수궁의 정문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 덕수궁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도 전인데, 정문부터 그 굴곡진 역사가 심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역사이니 조금은 더 애정을 가지고 '대한문'을 지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한문 앞 '월대' -각종 의식을 행하는 기능 외에도 건물의 위엄과 왕의 권위를 한층 더 높이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시설물로, 터보다 높게 쌓은 넓은 기단을 말한다- 도 복원되었으니 -다소 아쉬움이 남는 복원작업이었지만-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란다.
중화(中和, 가운데 중, 화할 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에서 유래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중국의 공식 명칭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사용되는 중화(中華, 가운데 중, 화려할 화)가 의미하는 '자신들의 나라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뜻과는 전혀 상반된 의미이다. 그리고 덕수궁 중화전의 현판 속 중화(中和)의 숨은 의미 속에는 대한제국의 운명이 점점 일제로 치우쳐가는 "어긋난 질서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다 한다.
건축적으로 잠시만 살펴보면, 덕수궁 '중화전'은 조선시대 기술로 지어진 거의 마지막 건물에 해당된다.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붉고 황금빛을 띠고 있다. 중화전 앞으로는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월대와 이를 오르는 답도와 계단이 갖추어져 있으나 왠지 경복궁 등 다른 궁궐에 비하여 초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상실한 고종의 위상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좋지는 않다. 그리고 처음 중화전이 세워졌을 때는 경복궁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2층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규모가 축소되어 단층으로 진 것이 다른 궁궐의 정전에 비하여 다소 왜소한 느낌을 더해주는 듯하다.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독'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궁궐에서 주요 건물의 월대와 그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안에 물을 담아놓았다. 드므에 담긴 물에는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 닫집은 불단이나 어좌 위에 목조건물의 처마 구조물처럼 만든 조형물로 '닫'은 '따로'라는 옛말이다. 닫집은 '따로 떼어놓은 집'이라는 뜻으로, 그 모양이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 놓은 것과 같아 닫집이라고 한다. 또한 당가(唐家)라고도 하는데, 이는 당나라에서 온 집이라고 해서 당가라고 한다.
☞ 고주는 내부에 세워지는 높은 기둥을 말하는 것으로, 지붕의 경사가 있기 때문에 외부에 돌려지는 기둥보다 내부에 돌려지는 기둥의 높이가 높아, 기둥 높이를 기준으로 외곽 기둥을 평주(平柱)라 하고 내부의 기둥을 고주(高柱)라고 한다.
☞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 혹은 집중시켜 구조적으로 안전한 완충적 기능을 하기도 하고, 내부 공간을 확장시키고 건물을 높여 웅장한 멋을 낼 뿐 아니라, 그 구성과 공작이 섬세하고 화려하여 장식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가지는 구조를 말한다. 공포는 우리나라와 중국 · 일본 등지의 전통 목조건축에서 건물의 가장 중요한 의장적 표현(意匠的表現)으로서 각 시대에 따라 특징을 반영한다.
석어당(昔御堂)은 덕수궁의 침전으로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다. 건물의 명칭인 석어당(昔御堂 : 옛 석, 어거할 어, 집 당)은 '옛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으로 한양을 떠났던 선조가 돌아왔을 때 머물던 건물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석어당이 눈에 띄는 것은 궁궐의 많은 전각 가운데 유일하게 2층 건물이기도 하지만 단청이 없어 전체적으로 흑갈색 톤인 외관 탓이다. 왕이 머물렀다 하기에는 석어당의 외관은 무언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굴곡진 역사의 비극에 있다. 석어당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고 폐위된 인목대비가 갇혀 지낸 곳, 그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무릎 꿇리고 왕위에서 끌어내린 곳, 광해군이 즉위하고 폐위된 곳,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가 즉위한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너무도 평화로운 바로 그 석어당에서 광해군, 인목대비, 인조의 악연이 얽히고설켜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쓸쓸해 보이는 것이다.
☞ 석어당이 단청이 없는 이유는, 선조가 행궁으로 사용할 당시에는 궁궐이나 사찰이 아니라 월산대군 사저(민가)였기에 단청을 할 수 없었다.
☞ 단청은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려서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한 것으로, 궁궐이나 사찰, 사원 등 권위를 가져할 건물에 한해서만 단청 사용이 허가되었다.
중화전과 석어당을 지나 덕수궁 뒤편 정원으로 나아가면, 덕수궁 내에 위치한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정관헌(靜觀軒)이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경내에 서양식 건물, 즉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는데, 그중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 바로 정관헌이다. 정관(靜觀)은 ‘조용히 바라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름 그대로 정관헌은 덕수궁을 조용히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모양새 또한 매우 독특한데, 아마도 서양식 건축양식에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이 가미된 탓이리라. 단층 규모에 지하가 일부 있는 형태이며 목조와 석조, 벽돌을 혼용하여지었는데, 기둥 주변의 오얏꽃 문양의 목각 장식과 아칸서스 잎 모양의 코린트 주두 또한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져 독특하기 이를 때 없다. 참고로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국장(國章)으로, 조선 왕조(전주 이씨)를 상징하는 꽃인 이화(李花, 오얏꽃)를 도안화한 것이며, '코린트 주두'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기둥 양식 중 하나로서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이 건물은 설계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당시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기술을 많이 이용했는데, 아마도 러시아 공사관, 손탁호텔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A. I. Sabatin)사바틴이 경운궁 내 다른 서양식 건축물도 설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가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한국 전통건축은 누가 설계한 것이냐고?" 사실 한국 전통건축은 대부분 설계자가 없다. 목수와 기술자들의 수많은 경험과 장인 정신으로 일구어낸 건축물들이 오늘날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한옥과 전통건축들이다. 마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이름 없는 도공들의 땀과 장인 정신으로 태어나 세계적인 명품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서양 건축은 대부분 실명제다. 건축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당연한 문화였던 서양의 건축과 자신의 희생으로 누군가에게 해학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선사하는 이름 없는 동양의 건축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두 문화의 오래된 특성이니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한국인이다 보니, 한국의 건축에 왠지 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정관헌'에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에겐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했던 카페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공식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그래서 정관헌이 애당초 카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많고, 아마도 전용 카페는 아니더라도 황실에서 생활공간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정관헌 난간은 서양식 철제 양식이지만 문양은 소나무, 사슴, 박쥐 등 우리나라 전통 문양을 사용하고 있다.
☞ 오얏꽃이라고도 불리는 자두꽃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오얏 이(李)’자가 조선 임금의 성씨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덕수궁에서는 오얏꽃 문양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정관헌이다. 이 건물 기둥 상단에 하얀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 코린트 양식은 도리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기둥 주두 양식 중 하나로, 아칸서스 잎 모양의 장식요소이다. 목재로 되어 있는 외부 기둥 상부에 녹색의 코린트 양식을 볼 수 있다.
☞ 정관헌은 내부 기둥과 외부 기둥으로 나누어져 일종의 툇마루와 같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데, 내부 기둥은 중세 유럽 전역에 발달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이 줄지어 있으며, 외부 기둥은 목재로 기둥 상부에 오얏꽃 외에도 청룡과 황룡, 꽃병 등 화려한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제는 본격적인 서양이다. 중화전을 지나쳐 더 서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한국의 궁궐 안에 이런 건물이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전형적인 서양 건축 양식의 건축물이 나온다. 거의 완벽한 좌우대칭의 모양으로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이 다소 당황스러운데, 바로 석조전(石造殿)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라고 한다.
이 모든 당황스러움은 굳이 한국의 궁궐 내에 서양 양식을 들여온 고종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얼핏 이해가 간다. 사실 석조전의 건립 목적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고 황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지은 서양식 궁전인 것이다.
아관파천으로 나라의 위상은 떨어지고 주변 강대국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어 가는 가운데 권위를 회복하고 주변 강대국과 동등한 외교권을 가지는 황제의 나라를 꿈꾼 것이다. 석조전은 바로 이러한 고종의 원대한 꿈을 담고 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국권을 빼앗기고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까지 당하면서 준공 당시의 의도로 사용되지 못한다. 그야말로 대한제국의 원대한 꿈의 시작과 쓰디쓴 실패의 결말을 함께한 건물인 것이다.
설계는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날드 하딩(J. R. Harding)이 맡았다. 하딩은 석조 건물이 낯선 한국인들에게 공사에 앞서 나무로 1/10 정도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석조전 내부를 구경하다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거울들이 얼굴을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닌 보다 높은 위치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당시 거울은 사치품이라 인테리어용으로만 사용하여 더 높은 곳에 걸어둔 것이고, 조도가 낮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햇빛을 반사해 방안을 환하게 비춰주는 용도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 이오니아 양식은 기원전 7세기 초부터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달하여 기원전 6세기 이후 그리스 전역으로 전파된 양식으로, 섬세하며 여성적이고 우아한 것이 특징이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영국 박물관이 대표적이다. (우측 사진의 석조전 서관에서는 코린트 기둥 양식을 볼 수 있다.)
석조전 뒤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프랑스풍의 2층 건물이 이국적이고 산뜻한 색감의 외관을 뽐내며 언덕 위에 서있다. 대한제국 당시 고종이 즉위 4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행사장으로 사용하고자 건설한 '돈덕전(惇德殿)'인데, 1903년에 지어져 ‘대한제국 영빈관’으로서 외교를 위한 교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건물이 너무 새것이다. 백 년이 넘은 건물이라기엔 너무도 새집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최근에 복원된 건물이기 때문이다. 돈덕전은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건물로서 사신의 접견과 귀빈의 접대 등 제국의 외교의전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순종 황제의 즉위식도 여기서 거행되었는데, 일제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1920년대에 이 건물을 허물어 버리고 아동 유원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한 것을 2023년 9월이 돼서야 복원이 완료되어 일반 대중에게 다시 선보인 것이다.
돈덕(惇德)의 뜻을 살펴보면,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라는 뜻이다. '서경(書經)'의 '순전(舜典)'에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오늘날 덕이 있는 이와 어진 이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마치 돈덕전이 일제의 만행 아래 사라져 버린 1920년대처럼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
이제 후문을 통하여 덕수궁 밖으로 나가본다. 그런데 웬걸 여기도 덕수궁에 딸린 서양식 전각이 있다. 그것도 알고 오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도 않는 골목 안에 말이다. 바로 중명전(重明殿)인데 어찌 된 사연인가 하면, 원래 중명전 터는 궁궐에 포함되지 않은 땅으로 1890년대까지 주로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1897년 궁궐을 확대하면서 궁지로 편입되었고, 현재의 중명전 자리에 서양식 전각 수옥헌(漱玉軒)을 지어 황실 도서관으로 삼았다. 바로 이 수옥헌이 중명전의 전신인 것이다.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은 1901년 화재로 전소되었던 수옥헌을,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A. I. Sabatin)의 설계로 2층 벽돌 건물로 재건한 것이다.
'중명전'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한 장면이 펼쳐진 곳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중명전 건너편의 '손탁호텔'을 거처로 삼고 정동 일대를 일본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 바로 이곳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후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곳도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60년대까지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경성구락부(Seoul Union)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1925년에는 화재로 인해 내부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기도 하며, 최근까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수시로 변경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중명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그 이름의 기원과는 다르게 강제적인 늑약과 국치의 모욕 속에 영욕의 세월을 견뎌 왔던 것이다.
사실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것은 신변상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일본의 간섭을 견제할 목적이 컸다. 당시 경운궁의 북측 지역은 각국의 공사관과 인접하여 있었고, 경운궁 북쪽 지역을 매입하여 궁궐에 편입한 뒤, 중명전 외에도 만희당, 흠문각, 장기당, 양복당, 경효전, 환벽정 등 각종 전각을 지었다. 제일 북쪽에 위치한 환벽정은 러시아 공사관과 바로 맞닿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이 그토록 바랬던 꿈과 계획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의 고난의 시대와 민족 간의 비극적인 전쟁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현재로 이어져왔다. 어느덧 백 년이 훌쩍 지나서 이제는 어느 나라와도 동등한 외교권을 가지고 세계 강국들과 그 힘을 겨루는 위치에 올랐지만, 지난 아픈 과거의 기억들을 교훈으로 우리가 진정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과거에서 배워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만 묻혀 있는 것은 또 다른 어둠을 불러들인다. 과거의 교훈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오늘날에 맞게 적용하여 다시는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교훈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 이제는 과거의 교훈을 심각하게 받지 않으려는 풍조가 거세다. 개인만을 고집하며 이웃과 나라와 민족의 유익에는 무관심하면서 나의 유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불같이 성을 내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실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에 과거의 교훈과 미래의 희망이 생길 리 만무하다.
한나라의 문화와 방향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것은 오랜 세월이 걸리고 지난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되지도 않을 것이다. 나부터 변하고 나의 자녀부터 변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