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수필
2교시 시작종이 울릴 무렵 한 녀석이 급히 달려왔다. 숨찬 목소리로 아이가 말했다.
"쌤, 우유를 마저 치워야 해서 수업에 늦을 것 같아요."
아침에 복도를 지나던 한 선생님이 어떤 아이의 사물함이 열려 있어서 무심코 봤는데 그 안에 급식 우유가 빽빽하게 차 있더라는 거였다. 학년 부장이 가서 확인하니 아이들이 먹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 우유가 수십 개가 넘는단다.
우유가 발이 달려서 저 혼자 사물함에 가 들앉았을 리 없으니 애들 짓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물함 주인 혼자 한 일이라고 보기에는 우유의 개수가 너무 많다.
사물함의 주인인 아이는 아이대로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애초에 먹기 싫어서 제 우유를 몇 개 사물함에 넣어 둔 건 맞지만 어떤 애들이 언제 이렇게 자기 사물함을 우유로 가득 채웠는지는 몰랐다는 거다. 애들이야 귀찮아서 자기 사물함을 잘 잠그질 않으니 지들끼리 소문이 나서 이 녀석, 저 녀석 먹기 싫은 우유를 가져다 쟁여뒀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지 모를 리는 없고.
우유에 발은 달리지 않았지만 그중 번호를 달고 있는 우유가 있어서 사건을 일으킨 아이들 중 몇은 쉽게 잡혔다. 하필 우유갑에 반번호를 써 놓는 바람에 지들만 걸렸다고 투덜대면서도 사물함 주인도, 걸린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 이름은 불지 않는 놀라운 의리(?)를 보였다.
중학교 무상 급식지원에 이어 최근에는 지역에 따라 우유도 무상 지원이다.
모든 게 풍요로운 시대에 무상으로 지급되는 물품들이 적지 않아 철부지 아이들에겐 귀한 것이 별로 없다.
물론 유상으로 우유를 먹을 때도 우유신청을 한 아이들 중에는 밍밍하다고, 맛없는 우유라고, 귀찮다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먹지 않고 애를 먹이는 아이들이 있었다. 학교에서 먹지 않을 것 같으면 집에 가져가라고 날마다 잔소리하고 챙겨줘야 한다.
그나마 안 먹는 우유를 책상 위에 고이 두고 가면 고맙다.
덜 먹은 우유갑을 수거 상자에 그냥 던져서 교실 바닥을 끈적이게 해도 누가 그랬는지 묘연하고 지가 그런 게 아니니 그걸 치우려고 하는 아이도 없다. 그래서 유통기간을 넘긴 채 어느 구석에 박혀 있던 우유나, 아이들이 먹다 남긴 우유를 화장실에서 처리할 때는 화가 나기도 한다.
아이의 건강 때문에 우유를 신청했으니 제때 챙겨 먹이라는 학부모의 준엄한 당부를 들은 적도 있다.
언제부턴가 우유를 챙겨주는 게 담임의 또 다른 일이 돼버렸다. 그러니 번호를 매겨서라도 안 먹는 녀석을 찾고 챙기고 하는 것인데 아이들의 기발한 에너지를 어른들은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뭘 잘했다고 수업시간에 우유를 치워? 쉬는 시간에 해."
"냄새가 장난이 아니에요. 그니까 빨리 하고 갈게요."
"그걸 아는 놈들이 그런 짓을 하냐? 안 돼. 빨리 수업 들어와."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인상 팍 쓰고 교실로 향하는 나를 아이들이 순한 얼굴로 따라온다.
지들끼리 쳐다보며 웃는 걸 보니, 공부하기 싫어 혹시나 하고 말했다가 역시나 안 되는구나, 그런 표정들이다. 그래도 끝까지 고집 피우거나 달려들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으니 내 마음도 금방 누그러진다.
그렇지만 복도를 걸으며 다시 한번 다짐하는 잔소리를 빼놓지 않는다.
"너희들이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
나보다 한 뼘은 더 크고 한 덩치 하는 아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들의 천진한 웃음을 달고 같이 복도를 걸어가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