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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뼘 수필 Aug 31. 2023

서프라이즈 혹은 어쩌다 마주친

한 뼘 수필

작년 요맘때 일이다.

며칠 째 배에 통증을 느끼던 남편이 복통의 양상이 이상하다고 해서 병원에 갔다. 

의사는 맹장염일 수도 있다며 검사를 권했다. ct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작은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오늘 별일 없죠? 집에 계시죠?

아니, 지금 어디 좀 가는데.(아빠 아프다고 하면 말이 길어질까 봐.)

몇 초 침묵... 아들이 말했다.

엄마, 우리 지금 대구 간다고 나섰는데 2시쯤 도착할 거 같아요. 그전에는 오셔?

어? 너들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갓난쟁이가 몇 시간씩 차를 타도 돼?

전날에 통화할 때만 해도 전혀 언질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부터 됐다. 


아이 참,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는데. 

서프라이즈? 

안도감과 함께 짜증이 일었다. 

우리도 사정이라는 게 있는데 덮어놓고 그러면 되나? 그 시간에 우리가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며칠 집을 비울 수도 있다. 아직 출발 안 했으면 다음에 온나. 

단박에 아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엄마는 우리 가는 게 안 좋아요?

좋지. 그렇지만 이런 식은 아니지. 

엄마랑 아빠는 이제 맨날 집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나이 든 사람은, 은퇴한 사람은 뭐 일도 없나? 그리고 그 서프라이즈를 내가 했다고 생각해 봐. 예고도 없이 갑자기 너희 집에 쳐들어가서 서프라이즈! 그러면 너희는 좋아서 펄쩍 뛰겠나? 

작은애가 네, 죄송해요. 그러면서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복통의 결과도 걱정되고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면서 지들끼리는 얼마나 설레고 재미있었을까를 생각하니 미안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 한편으로는 화가 나고 답답했다. 

왜 은퇴한 부모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도 우리 생활이라는 게 있잖은가. 

부모는 아무 때나 자식이 들이닥쳐도 그저 반갑기만 해야 하나? 

반대로 우리가 아무 때나 마음대로 저들 집에 드나들면 좋겠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첫 손주인 손녀가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할 때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해 온 로망이 있었다. 

현관문에 리본도 달고 격한 환영의 문구도 써붙이고 이쁜 풍경도 울리게 해야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느닷없이 오면 나는 뭘 할 수 있나.

그놈의 서프라이즈가 다 망쳐버린 느낌이었다.

 백일이 갓 지난 아기를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도 걱정되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내가 황당했을 것이다. 

객지에 사는 아들이, 손녀가 서프라이즈 방문을 한다면 진심 깜짝 놀라고 환호하며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거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더구나 제 엄마는 오두방정의 대가니까.

한참만에 검사 결과가 나왔다. 맹장이 아니라 장염이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큰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병원 가셨어요?

어, 왜?

좀 전에 엽이한테서 전화 왔는데 엄마가 좀 이상하다고 해서요.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큰애가 말했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아빠가 배 아프다고 하셨는데 병원에 가셨을 거다. 그래서 엄마가 속상해서 그랬을 거라고 말했어요. 근데 장염이면 크게 걱정할 건 아니죠?

그래, 우리도 이제 집에 갈 거니까 니 동생한테 전화해서 와도 된다고 해라.

큰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오고 있어요. 아빠가 아프면 더 가야지. 그래, 어쩐지 오늘 서프라이즈를 꼭 하고 싶더라. 내 촉이 보통 촉이가. 그러던데?

큰아들네와는 같은 아파트 옆 단지에 살지만 서로 드나들지 않는다.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외식을 하고 우리 집에서 차 한잔 하며 정담을 나누다 가는 정도다.

전에는 길에서 어쩌다 마주치기도 했다.

서프라이즈와 어쩌다 마주치는 것.

무엇이 좋을까. 변수는 많고 정답은 없다. 

부모자식 간에 뭘 따져! 그런 생각도 있을 것이다.

같은 사람이어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집안마다 각자의 속사정이 다르고 사람마다 가치관과 지향하는 바도 다르다.


아, 흐르는 세월은 천진했던 아들들을 고민하고 판단해야 하는 어른으로 만들어 놨다.

문득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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