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수필
본격적으로 아이들 방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만 벼르다가 해가 바뀐 김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애들이 커가는 만큼 살림살이 또한 만만찮은 부피로 늘어난 데다 묵은 짐들이 사실 골칫거리였다.
침대를 치우고 옷장과 책상의 위치를 바꾸었지만 좀처럼 정리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벽면 두 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오래된 책장 때문인 것 같았다. 가슴은 아렸지만 이번 기회에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튼실한 원목으로 짜인 책장은 한때 내 애장품의 첫손가락으로 꼽힌 적도 있었건만,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으니 구석구석 찍히고 벗겨진 흠집이 왜 그리도 많은지, 또 그 안에 빼곡 들어찬 누렇게 바랜 책이며 더께로 먼지 앉은 잡동사니들은 흉물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게 나의 애장품 1호였다니.
목장갑 낀 손으로 책을 뭉텅이로 잡아 끌어내리자 부스스 일어나는 먼지 때문에 금세 코끝이 싸해졌다. 책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틈새에 끼여 있던 편지봉투 하나가 떨어진다.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다. 그 애와 뒹굴던 스무 살 무렵의 치기와 열정이 진한 그리움으로 떠올랐다.
대체 언제 적 거란 말인가. 둘째 아이가 가지고 놀던 파란색 부메랑도 발 밑에서 뒹군다. 던지면 빙글빙글 돌면서 제 자리로 돌아와 아이를 환호하게 만들었던 것인데….
아이들의 묵은 스케치북도 한 아름이다. 삐뚤삐뚤 선긋기부터 들쭉날쭉 도형 그리기, 제법 그림이 되는 것까지, 아이들이 한 장씩 그려낼 때마다 가슴 따뜻하게 차오르던 그 대견함! 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책장 뒤로 넘어가 있던 문고판 `독일인의 사랑'도 내 눈에 얌전하게 들어온다. 책장을 넘기니 `책을 좋아하는 조 군에게'라는 잉크문구가 번져 있다. 여고시절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주신 것이다.
나는 또 책장 구석에 자리 잡은 종이 정리함도 끄집어낸다. 정리함을 살 때는 예쁜 무늬를 고르느라 고심도 했는데 오랫동안 그 무늬와 빛깔조차 잊고 있었다. 거기엔 각종 상패며 수료증, 증명서, 상장들이 들어 있다. 수십 년도 더 된 초등학교 때 우등상장은 습자지처럼 얇다. 이런 게 있었지. 나는 공연히 고개를 주억거려 본다.
그랬다.
묵은 것들에는 지나온 시간의 흔적들이 고여 있다. 그때는 아름다운 것인지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무심하게 흘려버렸는데 그것들은 나와의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기약 없는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결국 그것들을 내버리지 못한다. 언제 또다시 펼쳐볼지 모를 그것들을 오래된 책장 속에 다시 얹어놓는다. 벼르고 벼르다 다부지게 걷어붙인 나의 소매는 그렇게 살며시 손목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