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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뼘 수필 Oct 03. 2023

한 뼘 수필

 채종답으로 산책 가는 길에 잠깐 다이소에 가려고 인도 위를 걸어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여자애들이 엄마야, 소리를  지르면서 이리저리 뛰어 도망을 갔다. 가로수 아래 떼 지어 있던 비둘기들이 느닷없이 달려들었단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이들과 비둘기를 쳐다만 봤다. 


 잠시 후, 여자애들은 다이소로 급히 들어갔고 비둘기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로수 아래 흙을 파헤쳤다.


그 광경을 보니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본 영화다. 친구와 나는 밀가루 투성이 파전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친구가 엉성하게 부쳐준 것이지만 고소했다. 누가 켜 놓은 건지 TV에서는 한창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우리는 건성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내용은 거의 생각이 안 난다. 갑자기 누가 소리쳤다.


 "어? 저것 좀 봐."


친구인지, 아니면 우리 수다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던 친구 남동생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소리에 우리는 수다와 먹기를 멈추고 다 같이 TV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을 새카맣게 덮은 수많은 새떼의 공격을 받으면서 정신없이 달리는 여자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공포에 찬 얼굴이었다. 우리는 다들 놀라서 순간, 수다와 동작을 멈췄다.


그때 나는 먹던 파전을 마저 삼키지 못하고 입을 아, 벌리고 있었나 보다. 갑자기 친구 남동생이 날 가리키며 푸하하하, 웃었다. 너무나 창피했다. 그래서일까, 새떼를 보면 입을 다물지 못했던 그래서 바보 같았을 내 얼굴과 영화 속 여주의 커다란 얼굴과 뭉크의 절규가 두서없이 엉켜 떠오른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친구가 남동생의 결혼소식을 전하면서 뜬금없이 말했다.


 "우리 00가 어릴 때 너 좋아했다."


엥?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게 웃지나 말지.


채종답의 논두렁을 걷는다. 스쳐 지나기만 해도 덤불에 있던 참새들이 화들짝 날아오른다. 일제히 키 큰 나무 위로 날아가 앉았다. 파들 거리는 가랑잎 같다. 논두렁에 내려앉아도 가랑잎들이 굴러가는 것 같다. 

내가 가는 논두렁은 거의 날마다 까치떼가 차지하고 있다. 백로가 드문드문 보이는 날도 있지만.

까치는 성깔이 있어서 그런지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른 척한다. 논두렁을 걸어가도 가까이 갈 때까지 버티다 마지못해 몇 발짝만 겨우 통통거린다. 악다받은 게 한 대 쥐어박고 싶다.

 그렇지만 날마다 만나서 그런지 까치들이 논바닥에서 저들끼리 낟알이나 벌레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친밀감이 들기도 한다. 날 보고도 날아가지 않으니 까만 깃털 끝이 짙푸른 색을 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날마다 까마귀들이 날아온다. 

덩치도 제법 큰 까마귀가 높다란 소나무 위에 앉아서 '악, 악, 악' 운다. 그렇게 들린다. 때로는 '아, 아, 아' 그런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소리 같다. 까마귀들이 높이 날면서 깨달은 건 뭘까, 알게 된 건 뭘까 싶어서 나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어서 남편에게 물었다.

 

"자들 울음소리는 악악악이야? 꺅꺅꺅이야?"

남편이 말했다.

"깨로로로롱 그러는데."

정말 말을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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