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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뼘 수필 Oct 07. 2023

무죄인가, 유죄인가

한 뼘 수필

어느 여고에서 근무할 때.

복도를 지나가다 화가 나서 우리 반 말썽꾸러기를 불렀다.

교무실로 들어가는데 아이가 달려왔다. 

성질 급한 나는 내 자리로 가지 않고 그냥 서서 잔소리부터 했다.

훤칠한 아이는 저를 꾸중하는 쪼그마한 담임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 그림이 너무 웃겼다.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말했다. 


"인마, 정말 정신 안 차릴래? 이쁘고 키 크면 다냐?" 

지나가던 교감 선생님이 말했다.

"아, 이쁘고 키 크면 다지, 뭘 바라는 겁니까?"

교무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한 때 유전무죄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쁘면, 키 크면 말썽 피워도 무죄인가?


대학 2학년 때 아님 3학년 때, 한 공고문을 보게 됐다.

유명 의류브랜드에서 대학생 모델을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원 자격에 학점, 용모, 키가 들어있었다.

생각해 보면 학점을 따지는 게 우스운 노릇인데 나는 키에서 분노한다.

왜! 대체 왜, 뻑하면 키를 따지는가.

키가 작아도, 키가 커도 땅에 발 붙이는데 전혀 이상이 없잖은가. 

그런데도 키를 따지는 세상이  참 못나고 불합리했다.

모델이라고 꼭 키가 커야 하나? 그런 고정관념은 깨부수어야 한다.




격분한 나는 참으로 이상한 짓을 하게 된다.

키를 10센티 더 크게 허위 작성해서 응모신청서를 제출한 것이다.

물론 사진은 잘 나온 것으로 골라서 정성스럽게 붙였다.

모델로 뽑히면 그때 흥, 보기 좋게 박차고 나오리라 굳게 다짐했다.


집으로 전화가 왔다.

서류심사 통과됐다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거였다.

나는 신이 나서 설치고 다녔다. 

남자친구는 당장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걱정을 늘어놓았다.

"사기 아냐? 잘 알아봤어? 정말 모델할 거냐?" 

걱정이 된 남자친구가 면접 현장에 동행했다.


브랜드 매장 대기실에서 나랑 어떤 여대생이 같이 대기했다.

그 애는 키가 크고 참 개성적인 용모였다.

미대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내 이름을 먼저 불러서 들어갔다.

디자이너가 서류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물었다.

"여기 적힌 키는 아닌 것 같네요?"

"네, 맞습니다."

"아니, 왜 그러셨어요?"

"왜 모델은 반드시 키가 커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키를 허위로 적은 건 잘못했지만 저는 직접 여쭙고 싶었습니다.

작은 사람들 옷은 만들지 않는지."


디자이너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동안 날 바라봤다.

그리고 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솔직히 그쯤에서 나는 완전 전의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혹시 사문서 위조, 이런 걸로 벌 받으면 어쩌지?

그런 자각이 그제야 들었던 것이다.

디자이너는 합격하면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몇 달 후,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

그리고 그 브랜드 매장에 서 있는 키 큰 모델을 보았다.

같이 면접을 봤던 미대생이었다. 

반가워서 아는 체를 했더니 그 애도 반가워했다.

재밌냐고 물었더니 다리 아프다고 했다.



나는 허위로 작성한 응모신청서로 인한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키 작아도 무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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