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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장 반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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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 Oct 08. 2024

Whale

[한 장 반]프로젝트21

by 이작


소년은 어른들의 생각만큼 그렇게 어리지 않았다. 내년이면 형님반으로 올라가고, 그 다음 해엔 초등학교에도 갈 나이였다. 자다가 엄마 손에 끌려 나와서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엄마가 검은 양복을 입히고, 검은 띠가 둘러진 아빠 사진을 보자, 소년은 이내 지금 벌어진 일을 이해했다.


이건 아빠들만 입는 옷인데. 소년은 자기한테 맞는 검은 양복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양복을 빌려 준 사람들은 아빠가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고 자기 옷까지 준비해둔 것일까. 미리 알았다면 자기한테, 아니 엄마한테만이라도 미리 말 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생각했다.


엄마는 소년을 안고 울었지만, 소년은 왜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빠 친구라는 처음 본 삼촌들이 소년에게 용돈을 주었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한참을 서서 아빠의 사진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와 자기가 해야할 일을 했다. 사람들이 사진 속 아빠한테 인사를 하고나면 사람들과 맞절을 했다. 묵묵히 몇 시간을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을 맞았다. 이모가 밥 먹으라고 하면 밥을 먹고, 엄마가 머리를 쓸어주며 이제 그만 자라고 하면, 잠을 잤다. 그리고는 또 깨서 사진 앞을 지켰다.


할머니가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치고, 엄마한테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욕을 하고, 할머니가 자기를 끌어안고 아이고 이 어린 것이 불쌍해서 어떻게하냐며 울음을 터뜨려도 할머니 품에 안겨 가만히 있었다.


소년의 엄마가 소년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남편을 보내고 한 달쯤 지나서였다. 그날부터 이때까지 소년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일부터 엄마가 일을 나가야 하거든. 그래서 조금 깜깜해질 때까지 집에 혼자 있어야 해. 알았지? 잘 할 수 있지?”


소년은 어른스럽게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말을 잃은 아들 옆에 있어주어야 했지만, 생활비는 벌어야했다. 그렇게 귀한 손자면 좀 봐주면 좋으련만, 시어머니는 그대로 앓아 누으셨다. 당신 아들을 잃었으니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소년의 엄마도 자기 아들을 보니 속이 상했다.


소년이 고래를 만난 것은 그때쯤이었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데, 커다란 고래가 나타났다. 원래 있었던 것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몸 전체가 하얀 고래였는데, 얼마나 몸집이 큰 지, 거실이 가득 찰 정도였다. 깜짝 놀라 눈도 입도 주먹만큼 커졌지만, 소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래를 바라보았다.


형님반으로 올라가서도 소년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혼자 집에 돌아와 소년은 엄마가 차려놓은 밥을 먹고,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하루종일 고래와 시간을 보냈다. 왠지 말도 할 수 있는 고래 같았지만, 둘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고래는 소년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지만 엄마는 고래를 보지 못했다. 엄마가 고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안 소년은 엄마에게 고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소년의 엄마는 소년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았지만, 소년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도 소년은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 엄마가 의사와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꼬마 하나가 휠체어에 앉아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종종 있는 일인지, 간호사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꼬마의 엄마만 애가 타 아이를 달래느라 애쓰고 있었다.


고래가 소년에게 하얀 풍선 하나를 주었다. 소년은 풍선을 받아들고 고래를 쳐다 보았다. 고래의 눈짓에 풍선을 꼬마에게 가져다 주었고, 꼬마는 금세 울음을 그쳤다. 병원에는 아픈 아이가 넘쳐났고, 울 기운조차 없어 겨우 눈만 껌벅이는 아이도 많았다. 고래는 아이들을 위해 풍선을 만들었고, 소년은 풍선을 나눠주었다. 자리를 비운 소년을 찾느라 깜짝 놀란 엄마 손에 잡힐 때까지 소년은 고래와 함께 병원 곳곳을 돌아다녔다. 


소년과 엄마가 병원에 갈 때마다 어떻게 알고 풍선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풍선을 받은 아이들이 아픈 것을 잠시 잊고는 오랜만에 웃음을 띄었기 때문이었다. 환자의 보호자들은 아이들이 풍선을 좋아하나 하고 여러가지 풍선을 사다주었지만, 소년이 주는 풍선만이 어린 환자들을 기쁘게 했다. 


소년은 막 어린 딸을 멀리 보낸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소년이 손에 풍선을 건네줄 때까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손에 든 풍선과 소년을 번갈아보던 아저씨는 그제야 실감이 난 듯, 풍선을 품에 안은 채 그 자리에 무너져 한참을 울었다.


소년의 엄마는, 소년이 어떻게 저 많은 풍선을 불어서 주나, 풍선 불다가 지치지나 않을지 걱정했지만, 어딘지 즐거워하는 아들의 표정을 보고는, 이제 소년이 풍선을 다 돌리고 돌아올 때까지 진료실 앞 의자에서 소년을 기다려 주었다.


1학년이 되어서도 꾸준히 병원을 다니는 것 말고는 소년과 엄마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엄마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늘 늦었고, 소년은 헷갈리는 받아쓰기 말고는 학교 생활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소년의 사정을 아는 선생님이 읽기 같은 것을 시키지 않는 것도 좋았고, 딱히 괴롭히는 아이들도 없었다.


고래가 처음 만날 때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소년은 눈치채지 못했다. 소년이 고래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고래는 강아지만큼 작아져 있었다. 소년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이 주먹만큼 커져 고래를 바라 보았다. 날마다 조금씩 작아졌을 텐데, 매일 같이 놀면서도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고래는 괜찮다는 듯, 되려 움직이기 편하다는 듯 소년 주위를 가볍게 휙 돌았다. 소년은 앞으로 다시는 병원에서 풍선을 나눠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 밤, 소년이 늦은 밤 문득 잠에서 깨어 나가보니, 주방에서 엄마가 울고 있었다. 소년은 엄마가 울음을 멈추길 기다렸으나 엄마의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어른들의 생각만큼 그렇게 어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는 엄마를 어떻게 달래는 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래가 하얀 풍선을 건네주었다. 소년 키만큼 커다란 풍선이었다. 이렇게 큰 풍선은 이제껏 처음이었다. 소년은 자기 손바닥 위에 올라 온, 이제는 겨우 사과 하나만큼 작아진 고래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어쩌면 이게 고래의 마지막 풍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엄마를 위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에게 풍선을 건네받은 엄마는 결국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엄마는 소년의 잠자리를 봐주었다. 침대에 누은 소년 머리 위로 고래가 날았다. 고래가 조금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처음 찾아올때처럼 아무 소리없이 사라졌다.


소년의 엄마는 아들의 방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 뛰어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왜 그러니?"

“엄마, 으아앙, 엄마, 고래가, 으앙 고래가…으아아앙.”

“고래? 무슨 고래? 꿈 꿨구나. 무서운 꿈 꿨어? 괜찮아. 괜찮아.”


몇 년 만에 처음 목소리를 내는 소년을 끌어 안은 엄마도 눈물을 흘렸다. 고맙다고, 말을 해줘서 고맙다고. 그동안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괜찮아 괜찮아 하며 등을 쓸어 주기만 했다. 


소년과 엄마는 오랜만에 한 침대에 누었다. 엄마의 팔을 베고 누운 소년은 울면서 웃으면서 고래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래가 언제 집에 왔는지, 고래랑 뭐하고 놀았는지, 풍선은 고래가 불어준 것이라든지, 풍선을 받은 아이들은 벌써부터 고래를 볼 수 있었다든지. 소년은 엄마는 몰랐던 이야기를 한참이나 쏟아내었다. 엄마는 소년의 말을 밤새도록 들어주었다. 소년의 방 천장에는 소년의 키만큼 커다랗고 하얀 풍선이 둥실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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