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게 식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쓴 맛이 입 안을 맴돈다.
지금 돈을 다시 돌려달라고 해도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조치도 없이 기다리기에는 서로 간의 신뢰는 이미 깨졌다. 최선의 대답이 무엇일까 고민하지만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는다.
아니, 사실 무엇을 꺼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는 깨진 신뢰를 대신할 법적인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이 단어가 주는 무게감 탓에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채무에 대한 공정증서를 작성해 줬으면 좋겠어."
※ 공정증서 : 공증인이 사권에 관하여 작성한 증서. 공문서로서 강력한 증거력을 가짐.
공정증서 얘기에 지인은 깜짝 놀란 듯했다. 아마 그가 기대했던 대답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나의 온정에 기대어 서로 암묵적인 채무의 연장을 기대했겠지만, 내가 꺼낸 건 딱딱한 법적인 서류가 주는 관계의 단절이었기 때문이다.
"공정증서는 좀 그렇지 않나? 너와 내 사이에 무슨..."
"아니, 무슨 말을 해도 내 결심은 안 변해. 더 이상 이 문제로 불안해하기 싫어."
처음 듣는 내 단호한 어조에 그는 제법 당황했다. 설득을 하려는 듯 몇 번을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가 가져온 공정증서 위임장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공정증서 위임장 작성을 위해 적혀 있던 내용을 읽어보던 지인의 얼굴은 다시 화색 빛이 돌았다. 너무나 단호했던 어조와는 다르게 내가 그에게 제시한 상환기간은 3년이었다. 거기에 매달 상환이 아닌 3년 뒤 일시 상환. 시간이 필요했던 그에게는 무조건 좋은 조건이었다.
"고마워."
"꼭 재기하길 바랄게."
이 한마디에 많은 것을 담았다. 예전과는 다른 상처받은 마음 탓에 무뚝뚝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인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꼭 그가 진심으로 제기하길 바랐다. 지인도 내 마음을 알아서인지 밝게 웃으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이제 우리 둘은 친형제 같은 지인관계가 아닌 공정증서가 보증하는 채무관계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내 마음속의 마지막 추억들이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게 공정증서 안에 마지막 온정을 담게 하였다.
이번 선택은 나를 어디로 이끌게 될까? 난 3년 뒤의 내 선택에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지만 한 번만 더 그 사람을 믿어보고 싶었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잠 못 이루던 밤. 그 밤은 내 뒤로 칠흑같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런 난 내 뒤로 기다랗게 뻗은 그림자에 많은 것을 묻어두었다. 이 그림자가 나를 크게 보여줄 것이라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