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는 매력이 있다. 한 푼도 안 들이고 연민을 자아낼 줄 안다. 달콤한 말로 사람을 홀린다. 밍기적거리지 않고 한순간에 사로잡을 박력이 있다. 사랑이 넘쳐나서 한 명의 이성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많은 사람에게 그 사랑을 골고루 나눠줘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늘 부족하다.
넌 고아로 자랐냐? 고아로 자라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사랑에 목을 매냐고 엄마가 그랬다. 계집애가 청바지에 티만 입고 다닌다고 꾸미지 않는다고 엄마한테 욕을 잔뜩 먹다가 하늘하늘한 옷을 입기 시작하면 영락없이 또 누군가를 만나러 다닌 거다. 다림질에 열을 올리면 동생은 또 누구 만나냐고 물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옆자리에 만난 애한테 반했다. 어떻게 저런 낯부끄러운 말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하는지 놀라웠다. 그네 말솜씨가. 나는 그의 말솜씨에 용돈을 나눠줬다. 매달 용돈 받는 날에 귀신같이 전화가 왔다. 집안이 쫄딱 망할 때까지 그의 지갑을 채워줬다. 집안이 망하고 학비와 용돈 벌이를 위해 과외를 했다. 이번에는 과외비를 받는 날이면 전화를 받았다. 술 한 잔 하자는 말에 나가보니 후배들을 잔뜩 몰고 와 있었다. 호구 몇이 그의 주변에서 늘 술값을 뜯겼다. 어느 날 다들 돈이 없는데 술을 먹자고 했다. 내가 반지를 맡기려는 찰나 그의 의리가 빛났다. 넌 가만히 있으라고 다른 친구가 주민등록증을 주인에게 맡기는 걸 지켜봤다. 그의 말은 여러 이성들을 홀렸다. 넘치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 많이 바빴다. 어쩌다 하루 나눠준 시간을 아껴서 그를 만났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으려고 학원 강사를 했다. 소수 정예로 고액을 받던 학원은 점점 기울어갔다. 압구정동의 화려한 상가들 불빛 속에 학원만 침침했다. 원장과 강사들은 출근하자마자 컵라면을 먹으며 망해가는 학원을 살릴 전투애를 다졌다. 비슷한 또래의 원장은 점점 내게 기댔다. 나의 위로를 사랑으로 알아들었다. 컴컴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 그는 사귀자고 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말을 받아준 게 문제였다.
언니는 왜 남자친구는 다 괜찮은데 애인이라고 데려오는 사람은 하나같이 이상하냐고 친한 경리직원이 그랬다. 생각지도 못했다. 멀쩡한 남자는 다 내버려 두고 어딘가 흠이 있는 사람만 골랐다. 그 흠을 채워주고 싶었나? 홀딱 반했다가 홀딱 식는 내 마음이 문제다. 천천히 두고 사람을 사귀는 게 아니라 번개처럼 반해서는 두고두고 뜯어보면서 싫은 것들을 집어낸다. 물건을 고를 때는 피곤할 정도로 요모조모 따져서 쇼핑을 싫어하는 내가 정작 사람을 만날 때는 두리뭉실해진다. 망년회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 이틀 사이에 죽고 못 살 사이가 된다. 하루 종일 호출을 하고 매일 만나는 양은냄비다. 사랑에 중독돼 그 살랑거리는 설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혼자 성을 쌓고 혼자 서사를 이어나갔다. 서른이 되던 해 불나방처럼 타 죽을 듯이 빠졌던 사람은 출퇴근할 때마다 호출을 했다. 안절부절못했다. 불안함은 의심으로 이어졌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아무리 호출해도 연락이 없어서 호출기를 열었다. 단순한 순자의 조합으로 쉽게 한 번에 열렸다. 열지 말았어야 하나 아니 연 게 다행인 건가. 놀라울 정도로 나와 비슷한 음성이 남겨져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정이 떨어졌다. 세련되게 차분히 헤어지자고 했다. 이별 다음 해 우리는 일로 만났고 그는 여전히 어제 만난 연인같이 굴었다. 그가 며칠 후에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몰랐다.
남자 보는 눈을 버렸다. 다시는 내 눈으로 누군가를 만나지 않겠다고 친구에게 선언을 했다. 결혼생활이 고달팠던 친한 언니는 도대체 왜 그렇게 연애하려고 애쓰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일을 할 때도 누군가를 만나서 마음을 시달리게 하고 고달프게 해야만 하나보다. 나는 내 마음을 돌보지 않았다. 애 먼 글 먼 시달려서 상처가 잔뜩 난 마음을 방치했다. 너덜너덜한 마음은 사랑만 보면 달려들었다. 나쁜 남자가 보내는 신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동창들이 와주었고 남편을 빼고 장례식을 치렀다. 나는 그는 뭐 하냐고 물었다. 조달청 물건으로 사기 치다가 들어갔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다고 그놈은 원래 그래라는 내 말에 동창은 너의 아름다운 첫사랑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웃었다.
나쁜 남자는 아름답다. 말이 아름답고 사랑을 위해 아름다운 포장을 할 줄 안다. 순간에 충실하고 미래는 기약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기 때문에 포착한 순간을 즐기면 기력이 빠진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모험을 위해 다시 날개를 펴고 날 준비를 한다.
불놀이를 함께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내릴 일이다. 급행열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마음보다 먼저 앞서면 안 된다. 마음이 겪을 고달픔은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내 마음을 내팽개치고 버린 눈을 보정하지도 않은 채 고집을 부렸다. 내 마음자리를 잘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