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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죽지 마라

by 송나영

공부밖에 살 길이 없는 것처럼 세상이 요란을 떤다. 유튜브 동영상에도 서울대를 나와서 공부하는 법을 알려주고, 연대, 고대 어느 대학이 더 높은지 우열을 가리는 영상이 많다. 매년 수능을 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재수, 삼수, 사수, 삼십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수능을 본다. 명문대학이 인생의 목표인 거다. 서울대를 나오고, 연고대, 상위권 대학을 나와서 아직도 수능에 연연해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상위권 대학까지 나와서 수능 공부를 가르치고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고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그 우수한 인재들이 수능을 둘러싼 사교육 시장에서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

내가 무슨 인생을 살고 싶고 어떻게 꿈을 키울지는 뒷전이다. 목표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다. 기가 막힌 것은 고등학교 입시체계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도 못하는데 당장 어떤 진로로 대학을 갈 것인지 써내라는 것이다. 꿈도 없는데 무슨 직업을 갖고 싶은지 먼저 물어본다. 주객이 전도돼도 한참 뒤집힌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무슨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바로 튀어나오나? 꿈을 키우기 전에 사교육에 매달려 숙제하기 바쁜데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를 여백이 없다. 세상에 무슨 일들이 있는지 느긋하게 알아볼 여유가 없다. 세상을 경험할 시간도 없다.

명문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초등 이전부터 선행을 달리는데 공부 말고 다른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부모가 온갖 정보를 채집해서 인생의 고속도로로 진입하도록 만들어준 길을 따라가기도 벅차다. 부모가 자식을 믿고 네가 알아서 공부하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이미 입시시장의 출발선에서 한 박자 느린 거다. 아무리 열심히 따라가려고 해도 몇 년을 학원 숙제로 내공을 다져온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다. 내신은 점점 떨어지고 수능은 갈 길이 너무 먼 오아시스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배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은 한 시간의 환상여행이다. 아는 것을 전제로 가르치니 배경지식 없는 아이들은 졸리기만 하다. 어느 아이가 그랬다. 고등 국어시간에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밖에 없다고 했다. 어느 수학 선생은 선행을 안 한 아이들이 몇 명인지 묻더니 바로 진도를 앞서 나갔다고 했다. 어떤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수학을 6-70점 정도 받았는데 담임에게서 신경정신과를 권유받아서 걱정을 했다. 십오 년 전에 들은 일이다. 공부를 못 하니 주의력결핍 검사를 받아보라는 거다. 대치동에서 주의력결핍약이 공부 잘하는 약으로 유명해서 먹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일로 신문기사로 나온다. 중추신경흥분제를 먹어야 공부가 잘 된단다.

아는 분이 사십 중반에 중국의 청화대로 짧게 유학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을 만났다. 북유럽에서 온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학연수를 왔고 자신은 아직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몇 개월의 교육 과정을 끝내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고국으로 돌아간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거 같아서 대학에 입학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60명이 넘게 한 반이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공부를 못 한다고 기죽어 지냈던 아이는 없었던 거 같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잘하는 대로, 못하는 친구들은 또 그들 나름의 무대가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편애하는 선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공부는 못 하지만 노래를 잘하거나 춤을 기막히게 잘 춰서 소풍을 가든지 수학여행을 가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아이들이 있었다. 성적으로 기죽은 아이는 없었다. 성적으로 잘난 척하면 은밀히 따돌려지곤 했다. 각자 개성이 뚜렷했었다. 다른 친구들을 잘 도와주었던 아이도 있었고, 미술을 잘했던 아이도 자기만의 독특한 세상을 펼쳤다. 누가 잘나고 못나고 따지기 전에 한 반이었다. 운동회나 소풍 때 진두지휘를 했던 애들은 성적이 좋은 애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아이들이 자기의 끼를 맘껏 발휘하여 반 아이들을 이끌었다. 끼쟁이 애들이 성적으로 밀려나 기죽지 않고 세상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공부를 관두기로 했단다. 성적은 나오지 않고 하기 싫은 공부를 하면서 울고불고하던 아이가 고등학교 때 공부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아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울 새도 없이 정신이 지쳐버렸다. 느리고 생각이 많은 아이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친 아이는 공부를 관두기로 하고 줄곧 누워 지냈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고 얼마든지 지원을 해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은 들리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연할 텐데 생각이 많은 아이는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릴 뿐 어떻게 시작할지 모른다. 결국 아버지의 가게로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교는 다니지만 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예전보다 훨씬 활기차다. 수능이 다가오자 아이가 대학을 포기했다는 말을 듣고 할머니의 걱정은 하늘이 무너질 듯했다.

대학이 다가 아닌데 대학을 가야만 인생을 잘 사는 것으로 우리는 안다. 좋은 대학 나와서 놀고 있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 허다하게 많은 걸 아는데도 대학이 만능열쇠인 거다. '엘리트가 세상을 망친다'는 책도 있다.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글을 아는 자가 화근이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섬에서 그들을 배에 태워 데리고 나왔다. 허생이 세상에 나온 것도 마누라가 공부만 하는 무능한 남편을 닥달했기 때문이다. 남산골 샌님이 글만 읽고 밥벌이에 등한했었고 사법고시로 신분 상승을 꿈꿨던 시대에는 고시 공부에만 십여 년 이상 매달렸다. 공부만이 세상을 구원할 듯 입시의 노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각자 갈 길이 있다. 먹물은 세상을 검게 물들인다. 알록달록한 세상에서 먹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색을 찾아야 세상이 더 환해지지 않을까?

청춘은 고단하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아야 하고 내 생계를 책임질 직업을 찾아야 한다. 무엇이 맞을지 아무도 모른다. 좌충우돌하며 고민하고 치열하게 견뎌내야 하는 뜨거운 불 속인 거다. 세상에 꽃 피우기 전에 좌절할 수도 있고 녹아버릴 수도 있지만 끝까지 버티고 살아야 한다. 기죽으면 안 된다. 세상은 다시 문을 열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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