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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by 송나영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외로운 거란다. 어젯밤을 홀딱 새우고 본 일본 드라마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었을 뿐인데'에 나온 말이다. 여주인공의 외할머니가 사랑으로 고민하는 손녀딸에게 해준 말이다.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말이 가끔 있다. 나도 모르게 그래 맞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외로운 거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20대 혼자이길 바랐다. 내 운명에 대한 계획이 빗나갈까 봐, 항로를 제대로 맞춰 가는지 몰라서 까닭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을 때는 철저히 혼자이길 바랐다. 일에 대한 열정으로 온 밤을 새워 고민을 하고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희열에 빠졌을 때는 외로움이 파고들 새가 없었다. 그때는 혼자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왜 외로운 건지 이상스러웠다. 혼자이고 싶어서 온몸을 흔들어 제길 때는 언제고 이제는 혼자라서 외롭다고 감정이 요동을 치는 게 정말 이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해서 외롭다는 그 지극히 평범한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거 같다. 그래, 내가 외로웠던 건 아들이 떠난 이후부터다.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려고 우리의 상처가 가득했던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에 맞춰 집을 고쳐 이사를 했다. 집을 옮기고 아들은 학교 앞으로 이사를 갔다. 새로운 공간에서 함께 했던 시간은 5개월밖에 안 된다.

아들이 떠난 후 상실감에 난 봉선화가 됐다. 툭 치면 울음이 터질 거 같았다. 이렇게 훌쩍 금방 자식을 떠나보낼지 몰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제 아들이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올 시간이 없을 듯하다. 아들의 계획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독립을 원하던 아들이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다시 들어올 리는 없다.

그렇게 방 좀 치우라고 잔소리를 해도 귓등으로 듣던 아들이었다. 결국 성질 급한 내가 보다 못해서 청소를 하고 방을 정리하게 된다. 하지만 아들은 자취를 하면서 깔끔하게 집을 치우고 살림도 야무지게 한다. 내가 가격이 저렴한 돼지뒷다리로 요리한 건 군대에서 먹던 거라 똑같다며 시큰둥하더니 저도 돼지 뒷다리가 싸다고 이거 저거 열심히 조리해 먹는다. 시험 기간에는 사 먹지만 끼니도 잘 챙겨 먹고 맛있게 잘 만들어 먹는다. 아들은 자신이 끓인 김치찌개, 감바스를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얼마 전에 아들에게 챙겨줄 물건이 있어서 가지고 갔더니 비밀번호를 안 알려준다. 왜 알려고 하냐며 비밀번호 알려주면 물건만 두고 가겠다는 나한테 굳이 만나자고 해서 자기가 집문을 열어준다. 자기 공간을 엄마가 함부로 헤집고 들어올까 봐 그런가 보다. 엄마의 방문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나도 그랬을 거다. 왜 오냐고 짜증을 부렸을 건데 내 과거는 다 잊고 아들이 반기지 않는 것이 섭섭해진 나이가 됐다. 사랑하는 아들이 둥지를 떠나 세상을 향해 비행을 준비하는 걸 자꾸 잊는다. 아들은 비상할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학업도 바쁘고 놀기도 바쁘고 인간관계를 만들기도 바쁜 나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감이 몰아치며 번갈아 기류를 형성한다.

밤을 홀딱 새웠다. 10회짜리 드라마를 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 버렸다. 어젯밤에 맥주 한 잔 마시는 첫 장면에 입맛이 당겨서 후다닥 달려 나가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 사들고 와서 보기 시작했는데 아침 7시였다. 느닷없는 남자 주인공의 엉뚱한 대사에 킥킥거렸다. 비혼주의자였던 여주인공은 외할머니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동안 외할머니의 가게가 넘어갈 위기에 처해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돈을 거래로 혼인서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같이 살게 되면서 무디기 짝이 없는 둔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눈치코치 없는 남자 주인공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던 여자주인공이 외할머니를 찾아간다.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와 맞선으로 결혼을 한 외할머니는 사는 게 바빠서 외할아버지를 좋아한 줄도 몰랐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제야 좋아하는 줄 알았고 외로웠다고 했다.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해서 외로운 거더라." 혼미했던 내 머릿속이 정리가 됐다.

내가 외로운 건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서였다. 사랑하는 아들이 보고 싶어서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외할머니의 말씀에 지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아들과 함께 살았던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살갑게 못해줘서 잘해주지 못해서 아쉬운 생각만 든다. 그래서 더 아들이 그립다. 같이 있을 때 다정하게 해주지 못하고 무뚝뚝하게 지냈던 시간을 생각하면 아프다. 어린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같이 부르던 'Puff the magic dragon'도 떠오르고, 학원에서 지친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다가 24시간 영업하는 고깃집에 들러 밤늦은 시간에 함께 먹던 저녁도 기억난다. 아들 혼자 떨며 엄마를 기다렸을 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첫 번째 여자친구가 엄마 닮았다고 얘기해 주던 다정한 아이였는데 엄마가 못되게 굴어서 더 미안하다.

어제 오전에 아들에게 전화를 받아서 보고 싶었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늘 그렇듯 아들은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한다. 다행이다. 아들이 일이 생겼다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아직까지 내게 마음 놓고 물어봐주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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