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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by 송나영

처음처럼 잘해보자는 생각이 들지만 늘 모든 것이 처음이다. 이 나이를 사는 것도 처음이고 부모가 된 것도 처음이고 결혼도, 이혼도 처음이었다. 항상 새로운 시작이다. 인생이 다시 시작되기가 된다면 내가 더 잘 살 수 있을까? 돌아보면 늘 치열하게 살았던 것도 같고 또 늘 푹 퍼져 있었던 것도 같다. 늘 한결같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극성스러운 삶과 극도로 게으른 삶을 오가며 살아서인지 나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요즘 가끔 밤마다 드라마 몰아보기를 한다.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 사는 게 속 시끄러울 때는 드라마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삶도 버거운데 드라마를 보면서 감정을 쏟는 일이 힘이 들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밤늦게 스트레스를 풀러 심야영화를 보러 갔었다. 일이 고돼 잠이 안 오면 오히려 밤이 새도록 영화를 보곤 했다. 그건 즐기는 게 아니다. 영화 내내 존 적도 많다.

삼십 대까지는 매일 책을 읽었다. 도장 깨기 하듯 책을 읽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읽은 거다. 그때 읽었던 책들 중에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다. 애를 키우면서 푹 퍼진 아줌마로 살아가는 것 같아 밤이면 웹서핑을 했다. 시간에 쫓겨 살다가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하루종일 동동거리며 하는 일은 많은데 마음은 갈수록 허전해졌다. 어느 날 쫓기는 내 마음을 놓아버렸다. 늘 잠이 부족해 애랑 눈 맞추고 놀아주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밤새 인터넷을 뒤적거린 거다. 아이와 함께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것에 마음을 쓰기로 했다. 내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고 아이를 업고 미술관을 들락거렸다.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 계곡으로 들로 산으로 돌아다녔다. 아이를 위한다고 설쳤지만 돌아보면 아이는 집에서 레고를 갖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었다.

아이가 크면서 나는 생활에 쫓겼다. 아이는 혼자서 집을 지킬 때가 많았다. 아이 점심을 챙긴다고 얼른 나오라고 재촉하고 음식점에 뛰어들어가서는 삼십 분만에 밥을 퍼먹고 수업을 하러 뛰어갔다. 애한테 빨리 하라고 채근하기 바빴다. 집에 오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숙제 다 했냐고 다그쳤다. 아이와 내가 한숨을 돌릴 때는 같이 영화를 볼 때였다. 지금도 서로 재미있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권해주곤 한다. 제대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살았던 아이와 내가 숨을 고르기 위해 캄보디아와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과 아이들이 함께 한 여행은 패키지여행이었는데 숨 돌리기는커녕 아침부터 밤까지 일정이 빡빡했다. 우리는 오롯이 즐기지 못했다. 일정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아들을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처음에는 무척 떨렸다. 아이가 잘 때도 육아책을 들여다봤다. 아이의 숨소리에 몸짓에 집중했으면 좋았을 텐데 뭘 해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애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었을 때 우리는 좋았다. 아이 혼자 마음껏 놀도록 실을 쥐어줬을 때 아이는 몇 시간 동안 온 집에 거미줄을 쳤다. 큰 대야에 콩이며 팥이며 부어주거나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가 욕조에서 하루종일 놀도록 내버려 두었을 때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방송일을 했을 때 온갖 종류의 시리즈를 비디오가게에서 빌려 본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의천도룡기며 녹정기 같은 무협물에서부터 양조위가 나왔던 홍콩 경찰시리즈물도 밤을 새우며 보았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다 찾아보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소설을 찾아 읽었다. 그동안 그 재미를 잊고 살았다. 소설책도 손에서 놓았고 영화도 언제부터인지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드라마가 제일 먼저 마음에서 멀어졌었다.

처음이다. 이 시간은 내가 처음 사는 시간이다. 늘 똑같은 일상을 살아도 처음으로 만나는 시간인 거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이 살아나는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십 대의 설레면서 떨리던 마음과 다르고 삼십 대의 몰두했던 열정과 다르다. 지금 나는 뜨뜻하지만 가볍지 않은 열정과 차갑지만 날카롭지 않은 마음과 처음 만난다. 그동안 풀 죽어 있던 마음이 싹을 틔운다. 드라마가 눈에 들어오고 영화도 보고 싶어진다. 요즘 가끔 밤을 새워 드라마를 본다. 오랜만에 살아있는 거 같다. 살아있음을 똑똑 점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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