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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남 May 20. 2024

주부라서 와인만 마셔요.

와인바 사장, 현직 주부(남, XX세)

패기 넘치던 스물여섯, 와인바를 열었다.


홍대에 위치한 12평짜리 고즈넉한 공간.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아지트'를 갖는 데 성공했더랬다. 사랑하는 그녀도 이때에 낚아챘다.


스물여섯, 와인 바를 열었다.


와인이란, 남자도 대화가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만약 와인을 몰랐다면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여전히 값싼 소주를 들이키며 '여자랑은 말이 안 통해'하고 있었겠다. 스물넷에 첫 연애를 할 정도로 여사친 하나 없는 처량한 인생이었다.


한 때 와인으로 잘 통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얼굴로, 이 정도 되는 (미모의) 애인을 만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와인 마시는 남자'라는 것 말고는 없다."


당시에는 이십 대 중반에 와인바 사장이라는 타이틀이 한몫했겠거니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역시 남자는 단순한 바보다.


지금의 나는 확신한다.

'와인을 마시면서 주고받는 대화' 덕분이라고.


최근 와인이 꽤나 대중화되었지만, 2015년 당시 와인 마시는 이십대 남자는 드물었다. 당장 내 주변만 해도 전부 대학생이었다. 값싼 소주로 부어라 마셔라 취하는 게 전부인 음주문화.


'잘생긴 것도 아니야. 몸이 좋기를 해? 여자 마음도 몰라. 술은 엄청 마셔대. 여자가 꼬일 리가 없지.'


"소주 한 잔 할래요?"는 잘생긴 놈들이나 먹힌다.

내가 하면 추하게 취해 갈 뿐이다.



와인은 여러 개를 동시에 놓고 비교하며 맛보는 재미가 있다.

와인은 다르다.

일단 부어라 마셔라가 안된다. 아니 못한다. 비싸니까. 살면서 본 적도 없는 프렌치 오크통의 향을 음미하는 게 핵심이 아니다. 한 병에 7잔 밖에 없는 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부을 용기가 없다. 그러니 한 잔 마시고, 그다음 한 잔이 있기까지 빈 간극을 '오디오'로 채워 넣는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말을 건네고, 말을 듣는다.


진짜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대화의 기회를 얻고, 서로 대화 시간을 갖게 만든다.


"와인 한 잔 할래요?"는 상대를 더 품격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첫걸음마다. 한 잔 마시고 한마디 말하고, 다음 한 잔 마시고 두 마디 듣는다.


그러니 남자들이여. 와인 좀 알아두자.

그리고 여성들이여. 와인 좀 요구하자.


전업 주부가 된 지금도, 와인은 꾸준히 찾는다.

가정의 평화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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