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복도에 새겨진 편지, 나의 서툰 종합병원 적응기

의사가운 공포증과 90%의 의학 용어, 그 높은 벽 앞에서

by 지인
일기 쓰고 책 보고 심야 라디오 듣고 편지도 쓰고 끄적거리는 것은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퇴사를 앞두고 집에서 가까운 종합병원 외래에 공고가 나서 원서를 넣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퇴사 후 쉬는 시간 없이 바로 입사하게 된 것이다.


처음 경험하는 종합병원의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원무부서와의 협업, 병원간호사들과의 교류, 타 검사 부서와의 협력, 담당 과장님들의 진료 스타일 파악, 동료 간호조무사와의 관계까지

고려하고 살펴야 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몸은 하나인데 해야 할 것들은 문어발처럼 여러 가지로 묶여있었다. 그 일들을 종일 시달리고 또 환자들의 아픈 감정에 휩싸여 화와 짜증 섞인 불평불만도 다 받아내야 하는 것이 나의 몫이었다. 그러고 퇴근을 하면 그냥 축 쳐진 파김치가 되어 그대로 쓰러졌다.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일기 쓰고 책 보고 심야 라디오 듣고 편지도 쓰고 끄적거리는 것은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정적인 나는 나가서 수다 떨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여행하고 하는 외적인 활동보다는 내적이고 정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하루의 피로를 잊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유일한 숨통이었다.


먼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는 가까운 듯 먼 사이였다. 소화기 내과에 전담으로 알고 갔으나 일반외과 진료 보조도 함께 해야 했다. 먼저 있던 소화기 내과 담당자, 외과 담당자 둘의 보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양 쪽을 다 커버하며 동분서주 바쁘게 시간이 가고 임신 중이었던 내과 담당자가 출산 휴가를 하고 다른 사람이 담당자가 되고 내가 내과 한 분을 맡고 외과는 바쁠 때 도와주는 것으로 흘러갔다.


소화기 내과 부장님이 총애하는 간호조무사가 출산휴가를 가게 되니 그 파장은 컸다. 자신과 손발을 맞춘 사람이 없으니 불편한 속내를 짜증과 화로 표현하시는 부장님이 좀 무섭고 편애하는 모습에 실망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휴가 후 복귀하는 선생님, 내과 담당하던 선생님은 내시경실로 들어가고, 나는 또 내과 외과를 양쪽을 서포트하고 있었다. 내과 담당자는 내 눈에는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행동을 너무도 잘한다. 윗 상사 중에는 그녀를 신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쇼핑몰을 보며 진료 끝난 환자 오더를 못 보게 하는 순간이면 너무 당황스러웠다. 근데 간호 부장님 발자국 소리만 나도 화면을 바꾸고 열심히 일하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며 설명도 차분히 한다. 그런 모습들이 내게는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조금 내숭을 떠는 이중적인 다중인격의 소인으로 보였다.


외과 담당자는 나보다 어린 친구였다. 근데 기가 세고 말도 막 한다. 술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즐기는 사람이다. 외과 진료실은 보조가 꼭 들어가야 하고 과장님이 환자에게 하는 처치를 곁에서 도와드리는 일들이 많다. 그러던 중 하는 실수들에 그 선임은 날카롭게 지적을 한다. 그래서 당황한 적이 많았다.

근데 그 선임도 실수를 한다. 내가 뒤에서 다 뒤치닥거리하며 수습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일 년 정도 함께 하고 그만두고 외과 후임이 구해지지 않아 내가 외과 전담이 되고 말았다.

난 의사가운 불안증이 있는지 의사 선생님들 옆에만 서면 덜덜 떨린다. 처치 보조 시에 손이 덜덜 떨리고 긴장이 많이 되어 외과보다는 내과를 하고 싶었는데 ,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다.


혼자 외과일을 처리하게 된 하루하루는 살얼음판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노력을 알아주시고 과장님들이 신임을 해주시고 칭찬해 주시는 시간들이 왔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다른 부서 중 약제과 과장님이 너무 무서웠다. 마약처방전 수기 작성해서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호통치는 소리에 오금이 저렸다. 약국 근처도 가기 싫은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몇 달 후 다른 분으로 바뀌고 조금은 편해졌다. 그래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또 하나의 복병은 병동 간호사들의 전화다, 환자의 상태 ,, 보고해야 할 것들을 외래를 통해서 전달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근데 의학용어를 90% 사용하는 전문적인 상황에 나는 당황했다. 용어를 몰라서 그대로 받아 적었다. 그리고 옆에 선생님께 물어보고 그렇게 이해가 되면 과장님께 전달을 했다. 그 과정들이 쉽지 않았다.

그중 병동한 곳의 수선생님이 날카롭다. 그 병동의 전화번호가 뜨면 긴장하고 받았다. 그리고 실수를 하면 바로 지적해 주시고 혼도 났다. 그런데 꼭 내 이름을 먼저 불러주셔서 감사했다. 일게 외래 간호조무사를 이름 챙겨서 불러주시는 경우는 드물다. 감사함에 여행을 다녀와 선물을 전해드리니 너무 감동하셨다.


원무과도 까탈스러운 직원이 있었는데, 그분을 피해 다른 번호로 걸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분과도 친해지고 싶어, 한 참 후에 편지와 선물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뒤로 조금 관계가 편해지고 부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관계가 복잡하고 넓은 종합병원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했다.

메인 병동 수선생님께도 잘 보이고 싶고 잘 지내고 싶어, 간식 선물도 드리고 가끔 바쁘면 일도 도와드렸다.

그러니 서서히 내게 마음을 여시고 편하게 대해주셨다.


난 선물 공세로 관계 맺기를 했다. 그리고 그게 진심으로 통했고 삼 년 일하고 일 년 출산, 육아휴직을 끝으로 퇴사를 했다. 둘째가 휴직 중에 연년생으로 생긴 것이었다. 부탁을 드려봤지만 연이은 휴직은 안된다며 퇴사를 권고하셨다. 너무 아쉬웠다. 3년을 쌓아온 공든 탑이 우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년 아이들 키우고 육아만 하다 출산휴가 가는 직원 자리가 급하다고 연락받고 바로 재입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 들어간 것보다 더 좋았다. 익숙한 환경과 사람들 그리고 답답한 집에서 뛰쳐나와 직장을 다닌다는 것으로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일도 너무 소중했고 재밌었다.


그렇게 2년 반을 일하고 난 세종으로 이사오며 그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어려움과 노력들 그리고 결혼과 육아, 내 인생의 반환점에서 많은 인연과 사건들이 있었던 그 병원은 내게 친정 같다. 그래서 가끔 가게 된다. 아파서 가는 거라 좀 아쉽지만,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길 바랄 뿐이다.


이곳이 빛바랜 사진첩의 색깔처럼 나의 젊은 날의 추억이 된 하얀 건물의 검은 이야기 일곱 번째이다.


나를 버티게 한건 덜덜 떨리던 내 손을 잡아준 과장님의 칭찬이었고, 가시 돋친 타인의 마음을 녹인 나의 작은 진심이었다. 이제 그 하얀 건물은 아픈 기억이 아니라, 내가 가장 치열하게 나를 증명했던 '친정'으로 남았다.

이전 06화하얀 건물의 화려한 조명, 그 뒤에 숨은 검은 얼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