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이라는 가면 뒤에서, 나는 나를 잃어갔다

존재감 없이 소멸되어가는 나

by 지인

친절이라는 가면 뒤에서, 나는 나를 잃어갔다



​병원 복도는 언제나 소독약 냄새와 긴박한 발소리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나의 이름은 '천지인'이 아니라 "저기요" 혹은 "조무사님"이었다. 누군가의 생명이 오가는 현장에서 나는 가장 낮은 곳의 톱니바퀴였다. 사람들은 나를 '의료계의 공순이'라 불렀고, 나 역시 스스로를 소모품이라 여기며 하루를 견뎠다.


​환자들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내 안에는 10살의 따돌림 트라우마와 차가운 엄마의 기억이 비수처럼 꽂혀 있었지만, 하얀 유니폼을 입는 순간 나는 '친절한 간호조무사'라는 가면을 썼다.
​"어르신, 식사하셔야죠. 기운 내세요."
​타인의 고통에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며 손을 잡아주었으면서, 정작 비명을 지르는 내 안의 아이에게는 한 번도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여주지 못했다. 병실 문을 나서면 나는 다시 무기력한 이방인이 되었고, 집으로 돌아오면 화가 많은 남편과 아이들이라는 또 다른 병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천사'여야 했고, 집에서는 '죄인'처럼 살았으며, 혼자 있을 때는 '유령'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나는 점점 다중인격 캐릭터처럼 분열되어 갔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 내가 왜 '사람'인지조차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사회성이 부족한건가? 그 물음은 병원 현장에서의 내 노력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사람을 돌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서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판정은 마치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에너지가 타인을 향한 '가면'을 유지하는 데 모두 소진되어, 나 자신과 대화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다.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고 사직서를 던지던 그 비참한 순간, 나는 비로소 그 무거운 유니폼과 가면을 벗어던졌다. 병원을 떠나며 내가 깨달은 것은, 타인의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기 전에 내 마음의 곪은 상처부터 짜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나는 병원 복도가 아닌, 하얀 종이 위에 글을 쓰며 나를 간호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린 채 소모되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소모품이 아니다. 당신의 친절 뒤에 숨겨진 눈물은 그 무엇보다 고귀한 당신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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