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환절기:마흔,동굴 속에서 시작된 두번째 탄생

이제 나는 나를 고치려 하기보다, 나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by 지인

[자서전] 인생의 환절기 : 마흔, 동굴 속에서 시작된 두 번째 탄생


​1. 코로나라는 합법적 도피처
마흔 고개를 넘기던 2020년, 나는 스스로 깊은 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상은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사태로 비명을 질렀지만, 역설적으로 내게는 고요한 안식처가 찾아왔다. 비말 감염의 공포로 사람과의 접촉이 위험요소가 된 세상. 대인기피증처럼 사람을 대하는 게 버거웠던 내게 ‘단절’은 합법적인 권리가 되었다.
​신랑이 출근한 낮 시간, 나는 종일 침대에 누워 시간을 지웠다.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숙제를 봐주는 최소한의 의무만 겨우 해낼 뿐, 아이들을 깊이 살필 마음의 여유는 바닥나 있었다. "어디 아파? 힘내."라는 주변의 걱정 섞인 말들에도 나는 그저 힘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세상과의 단절, 무기력, 그리고 우울. 나는 그렇게 복사지처럼 똑같은 하루를 꾸역꾸역 찍어내며 마흔의 첫 페이지를 보냈다.


2. 40이라는 숫자가 주는 상실감
"올해는 어땠어요?" 누군가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마흔이면 뭔가 이뤄놓고 여유로운 상태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내 모습에 스스로 무너지더라고요."
육아만 하며 보낸 10년의 시간 끝에 남은 건, 세상에서 뒤처진 채 나이만 먹은 이름 없는 '아줌마'라는 상실감이었다. 세상은 자율주행차처럼 앞서가는데, 나는 고장 난 시계처럼 뒤로만 가고 있었다. 몸을 비우고 싶어 음식물조차 삼키지 않았고, 야위어가는 모습에서 유일한 위안을 찾았다.


​3. 몸에 새겨진 훈장, 그리고 다시 찾아온 파도
그 후 2년, 잠깐 일을 시작하며 다시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2023년, 우울과 무기력은 더 거센 파도가 되어 돌아왔다. 사람들과의 부딪힘은 공황장애를 몰고 왔고, 불면증은 내 몸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몸에도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자궁 내 장치가 복강으로 이탈해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고, 곧이어 부갑상선 선종으로 절제술까지 치렀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두 번의 수술을 겪으며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수술 후 78kg까지 불어난 몸무게와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 뱃살은 나를 다시 자책의 굴레로 밀어 넣었다. 마흔셋, 거울 속의 나는 상처 입고 지친 이방인이었다.


4. 뇌의 지도를 따라, 마음의 길을 찾다
하지만 나는 이 미로에서 영영 길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용기를 냈다. 경희사이버대학교 심리학과 3학년 편입.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고 수강신청을 하던 날, 떨리는 손끝에 기대를 담았다.
​'방송통신대 때처럼 흐지부지 끝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발목을 잡지만, 이번은 다르다. 25년 전, 21살의 내가 처음 정신과 문을 두드렸던 그 간절함이 지금의 나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병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내 뇌 속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이제 나는 나를 고치려 하기보다, 나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하나씩 차근차근, 내 마음의 지도를 그려나가 보려 한다. 비록 걸음은 느리고 몸은 무겁지만, 이제는 침대 위에서 천장을 보는 대신 책장을 넘기며 내 안의 아이를 만나러 갈 것이다. 나는 이제 막, 내 인생의 두 번째 공부를 시작했다.

이전 03화마흔, 무너진 자리에 심은 희망의 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