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일지1
싱가포르는 적도에 위치한 도시국가다. 그곳에서는 매일이 여름이었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싱가포르에도 두 계절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나는 sunny, 또 하나는 rainy. 스콜이 내릴 때면 먹구름과 비의 장막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마치 투명한 커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오전에 학교까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땀이 났다. 오후의 체육 시간은 더 힘들었다. 땡볕 아래서 뛰고 나면 얼굴과 팔다리가 새까맣게 탔다. 원래도 마른 체질이었는데 살이 타서 더 말라보였는지, 엄마는 “이티오피아 난민 같다”며 걱정하셨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나는 육상부에 들어갈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체력 테스트 때 운동장을 열두 바퀴 도는 것, 그때만 달렸던 것 같다. 공부 위주로만 생활했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달리기와 가까운 경험이라면 마라톤 대회 봉사활동 정도였다.
당시 싱가포르의 학교에서는 일정 시간의 봉사활동이 의무였다. 전단지 돌리기, 적십자 활동, 장애인 학교 봉사 등 여러 가지를 해보았다. 모두 좋은 배움이었고, 좋은 경험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건 마라톤 대회 봉사였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두 명과 함께 새벽 네 시 반에 MRT를 타고 The Padang으로 갔다. (싱가폴 전철은 MRT라고 부른다. 샌프란에 BART느낌) Standard Chartered Marathon Volunteer 2011 티셔츠를 입고 gear check-in에서 두 시간 동안 봉사를 했다. 여섯 시 반부터는 게토레이를 따라 나눠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왜 이 꼭두새벽에 여기 와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해가 뜨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마라톤 참가자들이 열심히 달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멀리 풀러턴 호텔이 보였고, 시티 홀 쪽의 고층 건물들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달리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물론 그 감동은 금방 사라졌다. 나는 다시 대학 입시 준비와 공부에만 몰두했다.
당시의 나는 뭐든 빨리 하는 게 잘하는 거라고 착각했다. 학부도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방학 때도 수업을 들었고, 학기 중에는 보통보다 두 과목을 더 신청했다. 빨리빨리. 그게 내 삶의 속도였다.
졸업을 앞두고 연구실 알바를 하러 가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앉을 자리도 기댈 곳도 없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야지.’ 그것만 생각하며 버텼다.
원 노스 역이 왔다. 나는 서둘러 내리려 했다.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밖으로 나가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블랙아웃.
몇 초 후 정신을 차렸을 때, 사람들이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넘어지면서 대리석 벤치에 다리와 턱을 부딪쳤고, 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싱가포르는 더운 나라라서 벤치조차 차가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응급구조대 아저씨가 와서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병원비 걱정이 먼저였다. (싱가폴도 병원비가 미국만큼 비싸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몸이 망가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 페이스 조절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리도 다치고 턱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실험실 알바와 졸업 논문 작업은 느려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내가 원하던 해에 졸업은 했다.
졸업 후 화학 회사에 입사했다. 연말에 팀 단합 행사로 Standard Chartered Marathon 10킬로미터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나는 흔쾌히 신청했다. 4년 전 봉사했던 바로 그 마라톤 대회였다.
그날도 새벽에 MRT를 타고 The Padang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였다. 몸을 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출발선으로 향했다.
10킬로미터 코스는 마리나 베이를 따라 달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시티 뷰를 지나 에스플러네이드를 거쳐—사람들은 그 건물을 두리안처럼 생겼다고 해서 두리안 하우스라고 불렀다—멀라이언을 지나 다시 더 파당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달리기 시작할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괜찮았다. 하지만 시티 뷰 쪽으로 오면서 습도가 올라가고 더워지기 시작했다. 고층 건물들이 해를 가려주긴 했지만, 에스플러네이드 쪽에서는 햇빛이 쨍쨍했다. 땀이 비 오듯 머리에서 얼굴로 흘러내렸다. 주먹 쥔 손이 땀에 젖어 미끄러웠다.
예전 같았으면 빨리 달려야 한다고 땅만 보고 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체력도 안 됐고 날씨도 안 받쳐줬다. 대신 주위를 둘러보며 달렸다. 자주 보던 마리나 베이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줄 몰랐다.
땀을 닦으며 게토레이 한 잔을 마셨다. 여유롭게 달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다.
나의 첫 마라톤 대회 10킬로미터 기록은 1시간 10분. 10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렸다는 것, 그리고 달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는 것. 그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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