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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동하라 Jan 23. 2024

전력질주해 온 열정의 하루

두려움과 불안에서 깨어 나와

 눈이 계속 내렸다. 세상은 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그늘진 곳과 인적이 드문 곳은 빙판길이 되어 있었다.

     

  2005년의 겨울은 나에게 중요한 계절이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가장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웠던 해였다. 극복이란 두 글자가 그리도 괴로울 수가 없었다. 시간은 똑딱똑딱 잘도 흘러갔고 춥고 하얀 날 실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낙지가 유명한 낯선 도시로 떠났다.

     

  전라남도 체육 임용 실기 시험이 치러지는 날.

시험 종목은 농구 지그재그 드리블, 맨손체조의 핸드스프링, 100m 달리기, 수영이었다. 전국적으로 시험 종목이 달랐기에 원서를 쓰기 전까지는 핸드볼, 허들, 앞구르기, 뒤구르기, 다리 펴 앞 구르기, 물구나무서 앞구르기, 다리 펴 뒤구르기, 농구 골밑슛, 3점 슛, 배구 스파이크 등 여러 종목을 연습해야 했다.

     

  눈 쌓인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떨림에 집중되어 있었고 체육고등학교를 향해 앞만 보며 걸었다.


  실기 시험이 시작되었다.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함께 실기를 준비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알게 모르게 경쟁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종목별로 운동화와 복장을 준비했었고 종목이 바뀔 때마다 갈아입으며 실기시험에 진심으로 임했다. 그 상황을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온다.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다. 다시 돌아가도 운동화와 복장에 그렇게 진심일지 싶다. 농구 드리블은 운동화 바닥 형태가 생명이었다. 방향 전환을 빠르게 하도록 미끄러지지 않아야 했고 체육관 마룻바닥에서 강한 고무 재질의 마찰력이 필요했다.

    

  앞사람들의 미끄러짐의 실수를 모두 보고 있자니 긴장감이 더욱 높아졌다. 발바닥을 마루에 비벼보며 방향 전환 시험도 해본다. 


  내 차례다. 삐 소리와 함께 출발.

마지막 다섯 번째 라바콘을 돌며 익숙한 자동화를 밀치고 깊은 생각이 들어왔다.

‘저곳에서 두 번에 돌까. 세 번에 돌까. 어떤 것이 빠를까?’

생각에 집중하는 순간 동작은 느려졌고 박자를 놓치며 공이 손에서 살짝 벗어났다.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공을 놓치는 순간 실패로 돌아가야 했고 일 년을 다시 기다려야 했다. 영 점 몇 초의 순간 실격은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공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실격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 순간 악착이 생겼고 긴장은 사라졌다. 이판사판 공사판이라는 마음가짐이 움직임으로 이어졌고 연습했던 몸의 반작용을 믿으며 냅다 달렸다. 결과는 예상보다 좋았고 순간적인 괴물 덕에 첫 번째 실기 종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체조복장으로 갈아입고 체조장으로 갔다. 몸을 풀고 순서를 기다렸다. 심사위원들은 점수를 즉각적으로 들어 보여주었다. 주관적인 평가였기에 동작이 깔끔해야 했고 흔들림이 없어야 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고 첫 시도는 자신감과 시선 처리가 부드럽지 못했던 것 같다. B가 나왔다. 체조만은 만점을 받아야 했다. 여러 종목 중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종목이었다. 꼭 A를 받으리라. 꼭 A를 받고 싶다. 주문을 외며 몸에 힘을 빼고 심상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확한 동작을 떠올리며 가볍게 뛰어 들어가 양손을 오리발처럼 바닥에 접착시킨 뒤 힘차게 오른발로 차올려 양발은 곧게 펴 붙이고 공중돌기했다. 시선 처리에서도 실수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더 과하게 턱을 바닥과 수평을 이루듯 치켜들어 하늘을 향해 착지했다. 기대 반 불안 반으로 점수를 확인했다. 점수는 A였다. 바지 옆 라인에 양손을 붙이고 주먹을 강하게 쥐며 기쁨을 표했다.


  육상경기장으로 이동. 저항을 덜 받기 위해 준비한 7부 쫄바지에, 몸에 붙는 티셔츠를 입고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몸이 얼어붙었다. 식지 않는 몸을 만들기 위해 계속 움직여야 했다. 하얀 세상의 날은 너무도 추웠다.


    100m 달리기 시험이 시작되었다. 모두 추위와 싸우며 긴장한 얼굴이 역력했다.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비명과 함께 고통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스타팅블록을 차고 나가며 아킬레스건이 끊으신 것이다. 시험은 잠시 중단되었고 구급차에 실려 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일 년을 준비했는데 일 년을 또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고 안타까웠다. 절대 부상은 안 된다는 마음으로 무릎 뒤쪽에 구부러진 부분에 파스를 뿌려보기도 하며 열이 식지 않도록 계속 움직여 주기 바빴다. 스파이크화의 효과를 보기 위해 스타트 자세를 계속 적으로 되뇌며 벽을 뚫고 나가겠다는 각오로 뛰었다.


  마지막 종목의 수영이 시작될 때쯤엔 어둠이 찾아왔다. 불행하게도 시험 날 수영장 온수 조절 장치가 고장이 났고 날도 춥고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입김이 나오는 공간에서 수영복을, 입고를 기다렸던 그 순간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대기시간이 하루 같았고 소진된 에너지를 끌어올려 덜덜 떨고 있어야 했기에 에너지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차례가 가까워졌을 땐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얼음물에 온몸을 적셔 얼음 사람이 되었다.


  수영은 가장 자신 없는 종목이었다. 다이빙의 공포를 뛰어넘지 못한 상태였고 수영장 바닥에 이마를

박은 뒤로 자신감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앞서 진행 중인 수험생이 안전요원에게 구조되는 상황들이 발생할 때마다 심장은 요동치며 자신감은 땅을 쳤다.


  초를 단축하겠다는 각오보다 무조건 완주한다는 생각이 컸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배치기 스타트로 자유형이 시작됐다. 물로 귀싸대기 맞은 피부의 아픔과 차가운 얼음물의 공포로 온몸이 물에 담기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고개를 밖으로 빼고 맘껏 호흡하고 싶다는 크나큰 욕구가 수영장을 뚫고 나가는 듯했다. 일단 숨은 쉬어야 살겠기에 개헤엄 모드로 전환했다. 불안해 보이는 움직임을 포착한 안전요원들의 구출 작전이 펼쳐지려 하는 듯했다. 모양 빠지게 마지막 종목에서 끌려 나갈 순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괜찮다는 표현을 한 후 고개를 물속으로 집어넣어 있는 힘껏 팔을 젓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힘겨움을 딛고 휘저으니  끝은 있구나. 피니시 벽을  주먹으로 힘껏 터치했다. 힘껏 터치한 힘에 반작용으로 나의 몸은 물과 함께 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결승선을 벗어나면 3m 물속으로 빠져야 한다. 조금만 더 벗어나면 빠지게 될 텐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밀려나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나를 끌어올려 줬으면 하는데 나를 쳐다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려줘”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는 강한 힘이 나를 멈춰 세웠다. 그런데 난관이 또 있네. 평소였으면 가볍게 뛰어 올라갔을 높이인데 이렇게 몸이 천근만근일 수가. 손톱을 바짝 세워 바닥을 긁듯이 온 힘을 다해 물속을 빠져나가 본다. 수영복 입고 기어가는 꼴로 한쪽 구석으로 가 뻗었다.


   전력 질주해 온 열정의 하루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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