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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의 심리학 - 그들은 어째서 증오하는가?

[오늘의 심리학 #086]

Understanding Hate

 9 insights into hate from psychological research

 Posted Nov 25, 2019 Marianna Pogosyan Ph.D.


https://www.psychologytoday.com/us/blog/between-cultures/201911/understanding-hate



* 주요 내용

- '증오'란 무엇일까? 마틴루터킹은 이를 '참기엔 너무 큰 짐'이라고 했다.
- 심리학자인 Agneta Fischer는 연구를 통해 증오에 대한 9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1. 증오는 종종 오해에서 시작한다.
 - 증오심은 사람이나 집단이 나쁘다는 평가를 포함한다. 증오심은 일상 생활에서 밉다는 말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으나 점점 가벼워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한 증오를 경험했던 때를 떠올리라고 하면 떠올리지 못 한다.

2. 개인보다 집단을 미워하는 것이 더 쉽다.
 - 개인보다 집단을 향한 증오심은 더 빨리 퍼지고 증가한다. 그룹을 증오하는 경우 특정한 사람들과 마주치거나 그룹의 정보를 대조하지 않고도 증오심이 커질 수 있다. 이런 경우 당신의 증오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근거하고 있다. 
 - 분쟁 지역 사람들에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80%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룹에 대해 이야기 했다.

3. 증오심과 분노의 차이
 - 증오심은 개인/그룹 전체를 포함하며 어떤 특정 측면만을 향한 게 아니다. 즉, 증오는 '그들이 누구냐'에 초점이 있고, 분노는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에 초점이 있다.
 - 분노 상황이 반복되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땐 '경멸'이 일어날 수 있다. '경멸'이란 상대방에게 당신의 화를 낼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4. 증오심과 경멸의 차이
 - 경멸은 증오심의 차가운 버전이다. 증오심과 마찬가지로 경멸 또한 '당신이 누구인지, 성격이 어떤 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허나 증오심은 경멸처럼 무관심하지 않다. 사회적이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대상을 없애고 싶어한다.

 5. 증오심은 분노보다 더 쉽게 퍼진다.
 - 증오심은 분노나 좌절보다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훨씬 쉽게 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들은 사람들에게서 보고된 증오의 양은 같았다.

6. 증오의 생리학
 - 분노와 달리 증오심은 생리적 패턴이 없다. 장기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해선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순간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뇌와 신체의 반응은 분노와 비슷할 수도 있다.

7. 증오를 늦추어라.
 - 증오가 정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만약 사람들이 증오심에 다른 사람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구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바꾸려고 할 것이다.
 - 증오심이 생길 때 부정적인 감정의 다른 요소 역시 털어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
 - 예를 들면, "당신이 나를 싫어한다고 하는 걸 알아.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특징도 당신과 겹치지 않는다는 얘기겠지. 그게 사실일까?"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8. 증오로 번지기 전에!
 - 감정이 증오 수준에 이르지 않도록 분노 수준일 때 그 감정을 해소하라.

9. 증오심은 거리를 두어야 한다.
 - 증오심은 미워하는 개인/집단이 당신의 삶을 떠나거나, 완전히 바뀌거나, 혹은 당신이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을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소될 수 있다.




* Bandi Thinks


© tchickmcclure, 출처 Unsplash


 저는 악플이 싫습니다. 누군가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일순간 배설해내는 그 간편성이 무척 치사하다고 느낍니다. (정확한 사인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악플러들에게 비난을 받다가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 연예인을 보면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책임한 일들에 대해 끔찍함을 느낍니다. 독이 발린 칼을 상대방 앞에서 휘두르는 것과 같아요. 그 사람 앞에서 한 거긴 하지만 찌르려던 게 아니었다. 조심하지 않고 베인 그 사람 잘못이다. 애초에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해독제를 준비해두는 게 숙명 아니냐? 얘기하는 거겠죠.


 본 저널을 찾아내고 소개한 건 이런 저의 착잡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악플'에 대한 심리 실험이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정확히 '악플'만을 다룬 저널은 찾지 못 했네요. 허나 악플의 기저는 최근 '혐오'라고 불리는 '증오심'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본 저널을 소개합니다.


 저널에선 분노가 오랫동안 쌓여서 만들어내는 감정이 증오심 또는 경멸이라고 얘기합니다. 경멸은 더 이상 바뀌지 않을 거라는 냉소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차가움'을 지녔다면, 증오심은 증오하는 어떠한 특성을 지닌 개인/집단을 없애겠다는 '뜨거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증오심은 상대방에게 끊임 없이 얘기합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바꿔라.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너를 없애고자 할테니."


 이런 시선을 바탕으로 현재 사회의 다양한 국면을 해석해 보도록 하죠.




 1. 악플


 우선 악플입니다. 가수이자 연기자였던 설리씨에 이어 구하라씨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남자 아이돌인 강다니엘 역시 악플 때문에 너무 힘들다며 활동 중단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들을 극단으로 몰고 있는 건 '증오심'을 바탕으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불특정 다수의 악플입니다. 


 그런데 이런 악플은 유명한 사람일수록 많습니다. 대중의 기대치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많죠. 그리고 악플의 내용 자체가 허구인 경우도 파다합니다. 




 무한도전을 예로 들어볼까요? 무한도전은 대한민국 예능계의 한 획을 그은 국민 예능입니다. 허나 국민 예능인만큼 무한도전 멤버들이 받아야 하는 압박감은 대단했습니다. 국회가 잘 못 하는 건 봐줘도, 무한도전이 잘 못 하는 건 까야 한다는 말이 있었죠? 대대적인 사랑을 받는만큼 그들이 지켜야 하는 도덕의 선은 높았습니다.


 그 압박감에 못 이겨 결국 정형돈씨도 공황 장애 진단을 받았고 이후 무한도전에서 하차 의사를 밝히기도 했죠. 모두의 사랑이 자칫 하는 순간 칼날로 돌아설 것에 대한 압박감이 상당했을 거라 여겨집니다.



 우린 공인이, 특히 내가 눈 여겨보는 사람일수록 '내가 바라는 수준의 도덕심을 가지길' 기대합니다. 허나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 틀은 천차만별이죠. 불법 다운로드는 밥 먹듯이 하면서 표절은 하면 안 된다고 하거나, 때리는 건 괜찮은데 야한 농담은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등 그 기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즉, 개인이 가진 도덕의 잣대 자체가 '증오'를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안 돼!'잖아요.


 그러다보니 대중의 관심 속에 사는 연예인은 이 잣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한 사람의 증오 전체를 떠받게 됩니다. 즉, 악플은 그 사람에 대한 공격이 아니에요. 어떤 영역에 대한 증오심의 발현이죠. 그 대상이 되는 게 연예인일 뿐입니다. 왜냐고요? 유명하니까요.


 그러다보니 악플러들은 당연하게 말합니다. 



 그 정도 자리에 있으면 어느 정도의 비난은 감수해야 한다고 봐요.



 물론이죠. 그들이 바라는 공인은 자신의 증오심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입장을 바꿔볼까요? 그 증오심을 온통 받아야 하는 그 대상은 어떤 느낌일까요? '그래, 이건 나를 싫어해서 욕하는 게 아니라 이들의 삶 어딘가에 건드려진 무언가가 있는 걸거야.' 이렇게 초연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왜 다들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까? 내가 그렇게나 잘못 했나?' 이렇게 여길 것이에요. 모두가 칭찬을 하고 한 사람만 손가락질을 해도 박수보단 삿대질에 신경 쓰이는 게 사람입니다. 하물며 손가락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라면? 아무리 감싸는 이가 있어도 그들은 손가락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거에요.




 2. 그 놈의 혐오


 '혐오'라는 말은 잘못 됐습니다. 물론 '혐오' 자체에는 잘못이 없죠. 그러나 요즘 시대에 '혐오'라는 단어가 쓰여지는 자체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문제냐고요? 너무 쉽게 쓰여요.


 극단적인 단어는 그만큼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파급력은 단위 시간, 거리를 아득히 상위하는 폭발력을 지닙니다. 그래서 '프레임 싸움'을 하는 경우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했던 역사가 많습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민수가 우리 애를 때렸어요." 보다 "민수가 우리 아이에게 일방적인 특수 폭행을 가했어요." 라고 하는 게 더 자극적이죠? 경찰서에 신고를 한 경우 부모님이 어떻게 얘기할까요? 법정 싸움에서 검사는 어떻게 얘기할까요?


© johnhain, 출처 Pixabay



 그래서 '혐오'는 실제하지 않는 가상의 끔찍한 인물을 바탕으로 그 집단 자체를 좀먹습니다.


 천민의 피가 섞이면 그의 재능, 가능성 등은 안중에 없이 '상놈'이 되었던 옛 시대도,

 재벌이면 그의 노력, 가치관 등은 상관 없이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여기는 근성도,

 전라도 출신이라고 하면 그저 욕부터 했던 지역 갈등 프레임도,

 최근 남자, 여자의 갈등을 부추기는 '남성 혐오', '여성 혐오' 프레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분노가 장기간 쌓여서 증오심을 만들지만, 한 번 만들어진 증오심은 실제 그것을 겪지 않은 이에게도 쉽사리 전파된다는 겁니다. 그 첫 시작은 '분노 -> 증오' 였을지언정 퍼지는 과정은 '증오 -> 분노' 를 지니는 이가 상당하다는 거죠.


 유약하기 때문입니다. 혹여 모를 위험에게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아픔을 준 전적이 있는 특성' 자체를 멀리하는 셈입니다. 이 유약함이 '개인'을 세세하게 바라보는 거대한 장애물이 됩니다.


 사실 필자는 유형별로 성격을 구분 지어 유형별 대처법을 알려주는 강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형은 기본 특성일 뿐 개인을 판단하는 유일한 방법은 경험이죠. 하지만 일부는 너무 쉽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너 같은 사람을 너무 잘 알지." 라고요.


 이런 경우 어떤 집단의 특징 중 단 하나라도 하면 증오심이 발동하여 비난을 하게 됩니다. 논리, 배경 상황 등이 개입할 여지는 없어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3. 우리는 만만한 이를 '증오'하고, 두려운 이는 '경멸'한다.


© Tama66, 출처 Pixabay



 항상 하는 말 중에 '증오는 아래로 흐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대하고 높은 벽 앞에서 우린 벽을 탓하고 욕할지 언정 벽을 손수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는 거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같은 상황에서도 '증오'보단 '경멸'의 대상입니다. "그냥 내가 안 보고 말지." 하며 등을 돌릴 지 언정 문제 상황을 직시하고 싸우며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연인은 다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경멸'보단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어떻게든 바꾸려고 들며 다투죠. 허나 결혼을 하게 되면 또 달라집니다. 이제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상대방을 포기하죠. 우리 부모에게 내가 했듯이 말이에요.


 어떤 이야기이냐? 싫든 좋든 그들과 계속 노출된 채 함께 해야 한다는 인식이 그들에 대한 태도를 '증오'로 할 지 '경멸'로 할 지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즘 사회는 점점 내가 원하는 이들, 원하는 말만 듣는 게 가능해지는 시대죠. 즉, '증오'할 대상이 늘어나는 사회라는 얘기입니다.





 현대 사회에 일어나는 '증오'가 예전에 비해 갑자기 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증오' 역시 그 뿌리가 '분노'라면 더더욱요. 다만 '경멸'이 아닌 '증오'의 모습으로 바뀌어 조금 더 뜨거운 모습이 되었을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목표 삼아야 하는 건 이 땅의 '분노'가 그 다음 단계로 굳어지기 전에 충분히 얘기하고 풀어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증오'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죽이려는 독나이프를 너도나도 휘두르는 환경 아래에서 과연 '분노'가 적극적으로 풀릴 수 있을까 의문이고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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