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를 통해 보는, 논리의 비논리성
오늘 볼 영화는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입니다.
본 리뷰에는 스토리에 대한 전반적인 네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 불편하신 분은 페이지를 뒤로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 형아쌤의 반짝 평점
참신성 : ★★★★☆
(단순하게 보면 소재는 동물과의 교감. 그러나 극한 상황 속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보여주는 시사점은 영화를 깊게 합니다.)
몰입도 : ★★★★★
(이야기의 시작부터 우리는 결말을 알고 시작합니다. 파이는 살았어요. 그러나 이 영화는 재난 영화가 아닙니다.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함께하다보면 어느덧 우리는 파이에게 이입해있습니다.)
메시지 : ★★★★★
(영화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극명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만큼 의미는 더욱 짙어지죠.)
심리 : ★★★★☆
(파이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과 동물이라고 하기엔 공감되지 않는 초월적인 면이 있습니다. 파이가 아니라 파이를 대하는 일반인들의 태도를 통해 심리를 전달합니다.)
전체 : ★★★★★
(이성과 감성. 그 안에 논리와 현실성. 이 모든 전반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대략의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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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가운데 좁은 구명보트..
호랑이와 함께 남게 된 소년 ‘파이’의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들은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민을 준비한다.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로 떠나는 배에 탑승한 가족들.
하지만 상상치 못한 폭풍우에 화물선은 침몰하고 가까스로 구명선에 탄 파이만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구명 보트에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 그리고 바나나 뭉치를 타고 구명보트로 뛰어든 오랑우탄이 함께 탑승해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놀라게 만든 진짜 주인공은 보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
시간이 갈수록 배고픔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이 배에 남게 된다.
파이는 배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점차 ‘리처드 파커’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태평양 한가운데서..
집채 만한 고래와 빛을 내는 해파리, 하늘을 나는 물고기, 그리고 미어캣이 사는 신비의 섬 등 그 누구도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들을 겪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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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영화는 스토리, 영상미, 배우의 연기력 등 많은 요인에 의해 평이 결정되죠.
파이는 거의 모든 박자에서 빠지지 않고 충족하는 명작입니다.
리뷰 하는 게 무서울 정도지만... 누가 혼내겠어!
자, 시작해봅시다!
1. 파이 한 스푼!
파이는 비현실적인 캐릭터입니다. 인간 본연의 추악함, 약함이 어울리지 않아요. 어느 정도 초월적인 부분을 지니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파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불편함을 가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영화의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봅니다.
영화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 (작중 시점) 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나이 든 파이를 찾아옴.
- 파이의 어린 시절(성장 과정)을 이야기함. (이 과정에서 리처드 파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사건을 이야기 함)
- (메인 사건) 이민 길에 일어난 난파, 바다 생존기
-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외국인의 평, 파이의 이야기. 현실은 달라진 것 없이 돌아감.
조난과 생존에 대한 이야기가 메인인 영화 치고 파이의 어린 시절에 할당하는 시간이 꽤 깁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선 ‘파이’라는 주인공을 관객에게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위해선 ‘만약 이런 과정이 없었으면 영화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좋습니다.
파이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놀림 받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학기부터 자신의 이름에 대한 다른 해석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킵니다. 감정적으로 욕하고 떼써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전략 대신, 친구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둡니다. 그리고 자기는 묵묵히 노력할 뿐입니다. 내 말은 믿을 법 하다고요.
종교를 받아들이는 방법도 다릅니다. 남들이 믿으니까, 일단 믿고 시작해야 하니까 종교를 믿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종교마다 갖고 있는 교리를 즐기고 그것을 공부합니다. 의심도 하고 연구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파이는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심을 매우 굳건히 다지게 됩니다.
대상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갖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파이 눈에 호랑이는 포식자가 아니라 그냥 ‘리처드 파커’일 뿐이죠. 이를 위험하게 여긴 아버지에 의해 호랑이의 사냥 장면을 트라우마처럼 남기게 되고, 그 후 도식을 갖게 되지만, 파이의 본성은 ‘본질을 보는 눈’입니다.
이런 파이이기 때문에 영화의 중반부와 후반부가 설득력을 갖습니다. 파이가 이런 사람이라는 설명 없이 바로 바다에 호랑이와 파이를 떨어뜨려놨다면, 이후 벌어지는 표류기는 ‘뭐야. 저게. 말도 안 돼.’가 되었을 거에요.
하지만 파이이기 때문에, 파이를 알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얘기는 허구도, 영화로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파이에게 집중하게 되죠. 파이를 ‘공감’했으니까요.
2. 포식자에서 ‘리처드 파커’로 한 스푼!
조난 이후 배에 있는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뱅골호랑이, 인간.
얼룩말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하지 않고 배 한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얼룩말은 생존하려 노력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지켜보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얼룩말은 ‘무기력’합니다. 심지어 굶주린 하이에나가 자신을 뜯어먹는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저항을 합니다. 그리고 목숨을 잃죠. 움직여야 하는 순간 움직이지 않는 이는 가장 먼저 목숨을 잃습니다. 파이는 이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입니다.
하이에나는 끊임없이 자신의 살 방법을 도모합니다. 주변 상황은 응용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만 바라봅니다. 오랑우탄과 얼룩말은 배에 함께 탄 동료가 아닌 먹이일 뿐입니다. 얼룩말을 공격하고 오랑우탄을 공격합니다. 다치게 하고, 그 이득을 본인이 취합니다. 하이에나는 ‘이기적’입니다. 탐욕으로 가득 차있죠. 파이는 하이에나에게 저항하지 못 합니다. 하이에나를 비난하지만, 직접적인 그 어떤 것도 하지 못 하죠.
오랑우탄은 바나나줄기를 타고 표류하다가 파이의 배로 이동합니다. 측면에 앉아 얼룩말의 죽음에 소리지르고, 하이에나의 공격을 가로막죠. 파이는 오랑우탄이 하이에나를 방어하는 모습을 보며 잘 한다고 지지하고 통쾌해하죠. 그렇지만 오랑우탄은 약해요. 오랑우탄은 파이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그 안정감엔 현실성이 없습니다. 오랑우탄이 어떻게 하이에나를 이기겠어요.
마침내 하이에나가 얼룩말도, 오랑우탄도 잡아먹은 그 순간 배를 감싼 천에서 뱅골 호랑이가 튀어나옵니다. 곧바로 하이에나를 죽이고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파이마저 잡아먹으려고 하죠. 뱅골 호랑이는 ‘공포’스럽습니다. 파이는 그 공포에 자신의 배를 내어주고 간신히 부표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합니다.
그러나 뱅골 호랑이가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다시 배로 복귀하지 못 하는 것을 본 파이는 호랑이를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호랑이가 있으면 여전히 배는 ‘공포’스럽겠죠. 그러나 그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긴장을 유지했고, 생존해나갈 수 있었다는 것. 호랑이 역시 극한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파이와 다를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 호랑이는 파이에게 호랑이가 아닌 ‘리처드 파커’가 됩니다. 이후 파이는 점점 ‘리처드 파커’와 공존하게 됩니다. 길들이고, 다룰 수 있게 되죠.
부정 감정 역시 자신이 안고가야 할, 나를 보호해주는 무언가라는 것. 파이가 겪은 표류기는 우리에게 그런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3. 독이 되는 안정감 한 스푼
식인섬은 아름답습니다. 식수는 몸을 그득이 담고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넘칩니다. 미어캣으로 가득 찬 대지에는 식거리가 넘치죠. 안정적입니다. 바다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던 파이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그 안정감에 젖어들고, 안주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나 섬은 식인섬이었습니다. 평화에 안주하다간 섬의 일부가 되어 잡아 먹히게 될 뿐이었죠. 나는 없어지고, 극미한 흔적(이빨)만 남게 될 거라는 걸 안 순간 파이는 그 섬을 빠져나옵니다. 섬에서의 하루는 파이에게 안정과 휴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길게 안주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행위였죠.
파이는 결단하게 됩니다. 편하게 살다 죽는 길보다, 불편하고 불안하더라도 사는 길을요.
우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무작정 모험하라는 게 아닙니다. 안정적인 게 좋지 않다는 이야긴 더더욱 아니에요. 당신은 그 안에서 ‘나’를 세우고 있나요? 아니면 ‘나’를 죽이고 있나요?
4. 논리의 비논리성 한 스푼!
살아 돌아온 파이에게 사람들은 ‘배 사고의 원인’을 물어봅니다. 일개 승객이었던 파이였지만, 이들에게 파이의 증언은 ‘잡을 지푸라기’였겠죠.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파이에게 ‘납득할만한 이야기’를 요구합니다. 논리적이고, 본인과 세상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하죠. 파이의 표류기를 ‘논리적이지 않다.’ 는 이유만으로 ‘허구’로 치부합니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파이는 ‘믿을 수 없는 실제 이야기’가 아닌 ‘믿을만한 가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돌아갑니다. 진실을 찾는 과정과 엄정한 척도 속에서 오히려 진실은 묻히게 됩니다.
논리적인 시도는 비논리를 담아내지 못 하죠. 아무리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요.
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했으니 어떤 걸 믿을지는 당신의 선택이라며, 그 주도권을 넘기죠. 어린 시절 자신은 ‘파이’라고 부를지, ‘피싱’이라고 부를지 선택은 너희 자유라고 행동했던 것처럼요.
5.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나 자신에게 물어보게 됩니다.
‘믿는다는 건 뭐지?’
‘우리는 어째서 믿으려고 하지?’
‘우리는 믿는다는 확신을 위해 어떤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들이요.
저는 아름다운 섬에서 안주하기보다
식인섬에서 얻은 힘을 바탕으로 다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방향인가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함께 논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