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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긴급재난지원금은 정부의 실험이다.

정치 이야기 아닙니다. 저의 성향은 보수입니다.


 목 보시고 이게 무슨 얘기인가 싶어 들어오는 분들이 꽤 될 것 같으니 저의 기본 논조부터 밝힙니다. 저는 자유를 중시합니다. 결과적 평등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 성향은 보수입니다. 문재인 정권이 무척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 쓴 거 아니니 다시 한 번 읽어보셔요. 제 성향은 보수여서 문재인 정권이 무척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분이라면 앞으로의 이야기가 이해가 되실까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안내도 했으니 시작합니다. 






 1. 노동은 신성한가?


 인간은 부지런하기에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나태하고 현실 속에 안주했다면 여전히 과일 따먹고 사냥하다가 강한 포식자에게 잡아 먹혀 멸종했겠죠. 배고프지 않기 위해, 몸이 편하기 위해, 목숨이 위협받지 않기 위해 인류는 노력했습니다. 


 수요가 공급을 넘는 순간 갈등이 시작됩니다. 모두가 가질 수 없으니 상대에게 주지 않아야겠죠. 이 갈등은 이내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부족해지면 어쩌지?' 라는 불안함이 됩니다. 불안을 바탕으로 인간은 부를 축적합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잉여재산을 쓰지 않고 쌓는 것이죠. 


 한정된 재화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고 했던가요? 예전에는 당연한 얘기였습니다. 일을 하지 않은 자가 일을 한 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고, 동일한 보상을 받는다면 아무도 열심히 노동하려 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래서 점점 일을 할 수 있는 건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신성한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개인의 능력과 자유를 보장해주면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 부를 축적한다. 모두 나름의 노동을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경쟁하고 맞춰가며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 경제를 구축해간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맞아 떨어지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수적입니다.


 1) 공급이 수요보다 적어야 한다.


 2) 노력하는 이는 노력에 해당하는 댓가가 따라와야 한다.




 첫번째 전제가 시장 경제를 만듭니다. 두번째 전제가 근면성실한 노동을 만듭니다. 이 말을 반대로 보면 어떤가요? 각 전제가 무너지면 부작용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무너지고 있는 건 두번째 전제입니다.




 최근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한참 부상했습니다. 지금 잠잠한 이유는 헬조선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이미 당연한 개념이 되어서입니다. 일상이 되면 딱히 부각을 시키지 않는 법이죠. 입시 체제 위주의 교육열은 문제의 정답을 잘 찾아내는 이에게 혜택을 줍니다. 자연스레 경쟁하게 되고 이 경쟁에서 변별력을 기르기 위해 입시의 난이도를 높입니다. 일반 사람과 멘사 회원들에게 초등학교 수학 문제를 주고 누가 더 머리가 좋은지 판단할 수 없으니까요.


 어떤 방법이든 상향 평준화가 되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친 노력만큼의 댓가를 받을 수 있느냐? 라고 질문해보면?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개인이 들여야 하는 노력의 양은 늘어만 가는데 그에 상응하는 댓가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대기업에 가고 고소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점점 좁아지는 바늘 구멍을 뚫기 위해 남들과 차별화된 노력(어학연수, 봉사활동, 자격증 취득 등의 스펙업)을 합니다. 그러나 이내 그것마저 다른 사람들도 하게 됩니다. 세상은 특별해지라고 얘기하며 특별함의 기준을 높이기만 합니다.


 그 과정을 소화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납니다. 그들은 말하죠. "노력해도 안 되는 세상이야."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아지는 것이 없을 때 우리는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필요한만큼의 댓가는 얻고 싶고, 세상의 요구만큼을 소화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 자기 혐오로 빠지거나


 '노력해봤자 소용 없어. 인생 한 방이야.' 불확실한 요행을 노립니다.


 2020년 청년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이미 현실에 충분히 반영되고 있죠.




 자기 혐오에 빠진 이들은 우울함을 호소합니다. 우울증과 자살률의 증가로 나타납니다.


 우울한 와중에도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이 '나만 이상한 거야?' 라며 동료를 찾습니다. 공감물이 유행하고, 자기계발보다 "잠깐 쉬어도 괜찮아.",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해." 라는 힐링물, 위로 컨텐츠가 각광을 받습니다.


 우울함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 생각을 비우고 볼 수 있는 유머 코드 수요가 늘어나거나, 사회 현상에 대한 강한 분노를 합니다. 청년들의 투표율, 정치적 발언이 늘어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웅보다 우리와 똑같은 고민과 아픔을 가진 나약한 영웅을 원합니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응원합니다. 결국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강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대리 만족합니다. 국내에서 슈퍼맨보다 아이언맨이 폭발적인 인기를 이끈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불확실한 요행을 바라는 건 비트코인 사태에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과거 로또 도입 때에도 그랬고, 최근 코로나 사태에 삼성 주식을 가지고도 일어났습니다. 노력으로 부를 축적할 수 없다면 모험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국민 인식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돈 먹고 돈 먹는 일에 대한 관대함이 굉장한 나라입니다. 저는 유독 사기죄 형량이 낮고 솜방망이 처벌인 이유가 '부의 축적'을 바라보는 무의식적인 공감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노력만큼의 댓가를 받지 못 합니다. 앞으로 더더욱 심해질 겁니다. 청년들의 무기력, 돈에 대한 그릇된 신념이 팽배해질 겁니다. 




 과거 치열한 인생을 살아왔던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하는 대목이 여깁니다. 예전에는 노력하면 조금씩 쌓아갈 수 있었거든요. 근면성실함만큼의 댓가를 얻을 수 있었어요. 그러니 청년들이 무기력한 게 이해가 되지 않죠. "그렇게 누워있을 바엔 나가서 뭐라도 해!" 라고 얘기하는 거고 "나가서 뭐라도 하면 뭐가 달라져요?" 라고 받아치는 겁니다. 살아온 세상과 전제가 다르니 말이 안 통할 수 밖에요.


 그러자 기성세대 어르신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때는 하루에 한 끼 먹거나 굶을 때도 있었어. 삼시세끼 따숩게 먹을 수 있는 놈이 어디서 배부르게 원망질이야?" 맞는 말입니다. 과거에 비해 우리의 경제적 상황은 훨씬 좋아졌어요. 그런데 원래 가난은 상대적인 거에요. 굶다가 먹는 라면이 아무리 맛있어도 옆에 있는 애가 자장면 시켜 먹으면 왠지 초라해지는 거에요. 무엇보다 지금 논점은 라면이다 자장면이다가 아니라 '라면 먹을만큼 일해서 라면 먹었던 당신이랑, 자장면 먹을만큼 일하는데 라면도 못 먹는 나'의 대결이에요. 핀트 어긋난 잔소리만큼 부질 없는 게 없죠.






2. 전체적으로 발전하나, 개인적으론 못 살고 있다.



 궁금합니다. 어째서 일한만큼의 댓가를 받지 못 하게 되었을까요? 왜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게 되었을까요? 예전에 비해 생산성이 줄어들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나날이 생산성이 늘고 있습니다. 1인 평균 소비량도 정비례하여 늘겠으나, 그걸 감안하고라도 충분한 생산성입니다.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대량 생산을 기계가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모든 것을 데이터화 할 수 있는 온라인 세상이 도래하였으며, 인공 지능의 발달이 상상 이상의 능률을 보이며 단순 작업, 간단 응용 작업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니 단순히 공급과 수요만으로 경제를 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로봇이 개입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프레임은 소용 없습니다. 노동을 해야 생산성이 오른다. 생산성이 올라야 공급이 가능하다.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공급력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가 대가를 얻는다. 식의 순환 관계가 아니니까요.


 노동을 로봇이 가져갑니다. 생산성은 오르죠. 어쩌면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만큼의 공급을 인공지능이 해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은 적정한 노동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니 대가를 얻지 못 합니다. 일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당연히 갑의 입장에선 고효율 저비용 인력을 고용하고 싶죠. 결과적으로 개개인의 실력은 늘었으나 임금은 줄어듭니다. 그걸 막기 위해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한 거지만, 본인 역시 제한된 소득으로 힘들어하는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에게 이는 '자기 골수 빼서 직원 먹이는' 심정일 겁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일까요? 


 지금 상태에서는 없습니다. 개선이란 어디 하나가 잘못되었을 때 그 지점을 찾아서 고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느 곳 하나 잘못한 곳이 없어요. 발전한 과학이 잘못인가요?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잘못인가요? 변별력을 기르기 위해 난이도를 높인 교육부의 잘못인가요? 보다 적은 비용으로 높은 성과를 만들고 싶어하는 기업의 잘못인가요? 어디 하나도 나쁘지 않아요. 그저 상황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이렇게 되어갔을 뿐이에요.


 줄기에 원인이 없다면 우리는 뿌리를 봐야합니다. 만약 썩어가는 뿌리가 있다면 그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노동의 신성함에서 벗어나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해결 방법입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생산만큼 중요한 개념이 소비입니다. 소비가 왕성히 돌아가지 않으면 공급을 맡은 곳도 문제가 생깁니다. 생산을 하지 못 하게 되니 이는 또 다시 소비의 불균형으로 이어집니다. 순환을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가 균형 있게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죠.


 앞서 말했듯이 생산을 인공 지능이 담당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겐 소비자로써의 역할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기계는 소비를 하지 못 하니까요. 바로 이 과정입니다. 생산을 제외한 소비의 주체로써의 인류를 받아들이려면 노동이 갖고 있는 신성함 즉,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개념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물론 인공 지능이 유지하는 생산은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선을 맡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일'은 생존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기 계발, 자아 성장을 위한 취미와 자기 실현의 개념이 됩니다. 앞으로의 시대가 맞이해야 할 자본주의는 4차 산업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기본권(평등) 위에서 각자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일(자기 실현)에 따라 추가 소득을 얻는 형태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힘을 가지고 독재하거나, 바뀌어 갈 노동 프레임을 받아들이지 못 하면 인류는 공멸합니다. 확실합니다. 위기에 몰린 인간이 어떤 방법을 택하는 지는 역사가 증명했죠. 갈등하고 전쟁하고 공멸할 것입니다.






3. 긴급재난지원금이 성공할 때 도래할 세상.



 그런 면에서 저는 정부가 시행하는 긴급재난지원금을 찬성합니다. 전염병 사태가 자본의 흐름을 막았습니다. 소비자들이 소비를 하지 못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공급자들이 제대로 생활하지 못 하고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즉, 코로나 사태 이후 전 세계에 '소비자로써의 인간의 중요성'이 인증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본을 투입하여 지자체의 경제가 돌아가도록 모두에게 일정 금액을 나눠주고, 그로 말미암아 경제 불황이 위기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의 사회, 인식이 커다란 변화를 맞이할 것입니다. 실제 눈으로 본 거니까요. '이게 되는구나!'


 물론 의도치 않았겠지만 긴급재난지원금이 월 기본 소득 지원에 대한 실험의 장이 되었습니다. 전국민에게 나눠주는 지금의 움직임이 국민에게 월 기본 소득을 배부하는 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재난지원금이 성공하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성향은 보수입니다. 평등때문에 자유를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각 개인마다 잘 하는 분야가 다르고 보완할 영역이 다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야 해요. 서로가 서로의 맞춤이 될 수 있게요. 하지만 능력이 없고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굶겨 죽이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하지 않더라도 굶기진 말아야죠. 일한 사람에게 더 좋고 맛있는 것을 먹도록 하면 되는 거에요.




 노동이 생존이 아니라 취미와 자기실현의 영역이 될 때 인간은 비로소 돋힌 날개를 펼치고 지금 이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겁니다.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그 잠재력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멋지잖아요. 이런 삶. 세상의 흐름이 이 쪽으로 불고 있으니 더더욱이요.




https://www.youtube.com/watch?v=ykxiVs5eSxU&t=12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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