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덜컹대는 열차.

오른쪽 차선 #009.

자네는 미투 운동인가 뭔가 하는 그거 어떻게 생각하는가?
찬성인가? 반대인가?


이런 질문을 들었다. 그냥 “일어날 것이 일어난 거죠.” 라고 했지만 사실 “찬/반으로 가릴 문제가 아니죠. 그건” 이라고 하고 싶었다.

문득 동성애에 대한 찬/반 논쟁을 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 당시 적극적으로 논쟁에 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성애는 누군가의 삶에 자연스레 있는 거니까. 그 자연스러움에 대해 “옳냐 그르냐”를 판단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동성애 허용에 관련된 제도’ 찬반 토론을 하라고 하면 할 말이 많았겠지. 그러나 동성애 자체에 찬/반을 논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내가 뭐라고...

미투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성적 피해를 입었던 이들이 “이제 용기내서 말하겠다. 난 상처 받았다고.” 라고 하는, 일이다. 즉,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권 주장이다. 인권에 찬/반이 어딨겠는가. 일어날 것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 방향은 필히 좋은 쪽이다.


나는 가해자가 아닌데, 왜 눈치를 봐야 해?

밤에 골목길을 걷다보면 난처할 때가 있다. 앞에 여성분이 걷고 있는 거다. 세상 흉흉한 것도 알고, 이런 상황에서 여성분이 괜히 긴장할까 싶어 어떻게든 “안심하세요. 저는 해치지 않아요.” 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지만, 쉽지 않다. 천천히 걷자니 발소리를 죽이는 것 같아 불안해하실 거고, 빨리 걸어서 앞장서자니 점점 가까워질 나를 느끼며 얼마나 불안해하실까. 그래서 그럴 때 나는 괜히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한테 전화하면서 자신을 해할 사람은 없다고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엘리베이터에서도 의도적으로 앞에 선다. 만원 지하철에서도 가급적 두 손 모두 배 위로 올린 채로 간다. 혹여라도 스쳤다간 나나 상대방이나 당혹스러울테니.

솔직히 괜스레 억울하다. ‘아니, 누가 해친대? 나는 아무 생각 없는데, 괜히 의식하고 긴장하는 건 본인이잖아. 난 무고해!’ 외치고 싶다. 범죄자 취급 받는 느낌이 유쾌할 리 없다. 왜 무고한 내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거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불편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남자이기 때문이다.


우린 그들의 불안을 진정 공감하는가?

매일 오가는 길에 누군가가 지뢰를 뿌려놓았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렇지 않게 그 길을 다닐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돌아갈지 언정 다른 길을 택해서 갈 것이다. 그러자 지뢰를 뿌린 사람이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너무 걱정하지마. 지뢰를 뿌리긴 했지만, 그 중에 대부분은 고장난 지뢰야. 밟아도 안 터지는 게 훨씬 많아.”

아, 그렇구나. 안 터지는구나. 하면서 그 길을 다시 룰루랄라 다닐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고장난 지뢰든, 성한 지뢰든 보기에 매한가지이고, 혹여 하나라도 터진다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최소 발목은 날아갈테지. 지뢰 성능에 따라 목숨이 왔다갔다할 수도 있고..

이번엔 지뢰를 뿌린 사람이 화가 난 나머지 다른 길을 모두 막아놓는다.. 이제 좋든싫든 지뢰 길을 통해 다녀야 한다. 장담컨데 그 길을 편하게 오갈 수 없다. 한 번 밟아서, ‘고장났구나.’ 확인한 지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언제 다시 작동할 지 알 수 없으니까.

안 터지는 지뢰에게 잘못은 없다. 밟아도 터지지 않는데 제 풀에 겁먹고 안 올 뿐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겁먹는 그 사람이 잘못한 건가? 아니다. 그 사람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뢰가 터지기 전에 예방하는 것을 잘못이라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안 터지는 지뢰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 저들에겐 나도 무섭게 보이겠구나.'

성범죄에 있어서 성피해에 취약한 이들이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지 않다. 내게 피해를 줄지, 주지 않을지 모르겠다면 일단 피해를 주는 가정 하에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에 남자로써 내가 느낄 불편함은 그들의 두려움과 불안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불만할 수 없는 것이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의 목소리이다. 지뢰를 밟아서 심하게 다친 이들의 목소리다. 지뢰가 멋대로 그를 덮쳤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설령 그렇지 않고 “나는 분명 내가 터질 수도 있다고 얘기 했고, 상대방도 터질 것을 아는 상태에서 길을 걸었다고요.” 라고 말하는 상황이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에 한 발자국 더 나가서, 터지지 않는 지뢰를 밟았지만, 그 ‘꾸욱’ 하고 눌리는 그 느낌이 매우 소름끼쳤고, 더 이상 그 길을 걸을 용기가 안 난다는 목소리까지도 존중 받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길에 지뢰가 있는 것이 잘못이다. 지뢰를 뿌린 사람이 잘못한 거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그랬든, 아니면 재밌는 농담을 하고 싶어서였든 상관없다. “이 길엔 지뢰가 있어.” 라는 말 자체로 그는 권력을 가졌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뢰 길을 ‘표준’인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성’ 관념 변화는 남녀 모두의 과제다.

눈을 가려 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성’과 같이 인간 본연의 욕구는 더더욱 그러하다. 감추고 숨길수록 어딘가에 고인다. 그리고 썩는다. 악취를 풍기며 도리어 부패한 채로 확산된다.

미투 운동은 나에게 불편하다. 악의 없이 하는 스킨십도 의식하고 조심해야 한다. 웃길 거라 생각하고 뱉을 야한 농담도 삼켜야 할 지 모른다. 의도 없이 한 무언가가 문제 삼아질 수도 있고, 분명 합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했던 애정의 표현이 상대에게도 진심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건 무드 없는 행동처럼, 눈치 없는 행동처럼, 소극적인 행동처럼 평가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억울할지도 모른다. 말은 안 해 주면서 나보고 어떻게 알라고! 하며 소리치게 될 지도 모르지. 그러나 ‘성’에 있어서는 적당히 눈치껏 넘겨 짚는 문화 자체가 잘못된 거다. 둘 다 눈치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그 말에 진심을 담고, 그리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남자만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니다. 여자들 역시 자신의 성에 대해서, 섹스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지 말고 솔직해져야 한다. 성관념 변화는 남녀 모두의 과제다.


미투 운동, 부작용 역시 존재한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부작용은 매우 치명적이다. 사회에서 매우 강력한 권리가 있는데, 그건 바로 ‘공인된 약함.’ 이다. 약하다는 건 강력한 무기다. 모두가 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명확한 증거 없이 다수의 신뢰를 얻을 수도 있다. 성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조명은 이들의 ‘약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과정이다. 이를 악용하는 움직임이 당연 생길 것이다. 지뢰를 밟지 않았는데 “나는 지뢰 밟아서 상처 입었어요!” 라고 외치는 누군가가 생긴다. 그에 의해 누명을 쓰게 되는 사람들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 이는 명백한 문제이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수평이 되는 순간까지 위아래로 퉁기는 과정이 있는 거라고. 특히, 아래로 푹 꺼져 있었던 것이 상식적인 선으로 돌아오는 거라서 더더욱 파장이 심한 거라고. 그러니, 부작용 때문에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현상 자체를 없애려고 들면 안 된다. 상황을 인정하면서, 최대한 단점을 줄이고 조절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생길 무고한 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미약하지만 우리 사회는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은 그 근거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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