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과 설움은 그 가치를 과장시킨다.

오른쪽 차선 #004.

- 시중품이 애장품이 되기까지.

난 물건을 잘 버리지 못 한다.
그 예로 내 만화 [유쾌한 친구들(유친)]을 들 수 있다. 유친은 타블렛을 쓰지 않는다. A4 용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볼펜으로 선을 따고 연필 자국을 지운다. 2,200여장을 난 그렇게 작업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볼펜이 수명을 다 했다. 한 볼펜으로 60여장 그릴 수 있으니까 35개 정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얘네가 없었으면 유친도 탄생하지 못 했을텐데... 차마 쓰레기통에 넣을 수 없어. 그런 생각으로 방구석에 쌓아두고 있었다. 정리를 좋아하는 엄마가 볼펜 무더기를 버렸을 때의 충격이란..
밀려드는 슬픔에 저녁을 거부했었다.

애장품은 이렇게 탄생한다. 아무 것도 아닌 사물에, 추억이 스며든다. 그 추억엔 짙게 배어있는 정서가 있다. 그리고 그 사물은 시중품에서 애장품이 된다. 사람들은 쉽사리 버리지 못 한다. ‘사물’이 아닌 그 사물에 깃든 ‘추억’을. 나는 정에 연연하는 사람일수록 다 쓴 물건을 버리지 못 한다고 확신한다.

그럼 다 쓰고 나서 휙휙 버리는 사람은 정 없는 사람이냐고? 그건 억측이다. 정이 없는 경우도 있겠으나, 사물은 사물이고 추억은 추억으로써 분리를 잘 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사람은 대상마다 특정한 감정을 축적한다는 것.


- 사물은 감정을 담는다.

허나 감정이 따스한 추억에만 일어나진 않는다. 즉, 사물이 항상 좋은 역할만 할 수 없다.
요컨대 이런 거다. 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직장은 한 달에 한 번씩 사무용품을 구매하는 시간이 있었다. 필요한 물건을 리스트에서 골라 행정 서무에게 말하면, 모두의 요구를 취합하여 결재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볼펜을 다 썼던지라 1,500원짜리 제트스트림 볼펜 하나를 주문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주문 물품이 왔는데 제트스트림이 없었다. 뭐지? 주문이 누락됐나? 그 의문이 풀린 건 며칠 후에 있었던 전체 팀 회의에서였다. 회의 막바지에 센터장님이 나지막히 얘기했다.

“ 우리는 국가에서 주는 세금으로 지원비를 받아서 운영하는 곳이에요. 단 돈 1원도 쉽게 보고 허투루 쓰면 안 돼요. 행정 물품 사는 것도 그래요. 가지고 싶은 거 있다고 이기적으로 혼자서 좋은 거, 비싼 거 쓰지 마요. 나는 다 같이 쓰던가, 아예 안 쓰던가야. 자기 혼자만 편하자고 이기적으로 쓰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건데? 이런 부분도 좀 생각하면서 조심히 썼으면 좋겠어요. 내가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공평하자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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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내게 한 말은 아니지만, 그 대상이 자명했다. 좋고 비싼 거는 제트 스트림 볼펜이었고, 나는 이기적으로 혼자 쓰려는 욕심쟁이이며, 국가 혈세를 낭비하는 이기적인 놈이었다.

제트 스트림의 가격은 1,500원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선생님들이 “아까 그거 제트 스트림 얘기 맞죠? 진짜 대박이다...” 라고 할 때 “ㅋㅋㅋ선생님들. 저 생일 선물로 고급 제트 스트림 하나 선물 부탁드려요. 이번 생일 럭셔리하게 보내고 싶네.” 라고 받아치고 말았으나, 속으론 빈정 상했다. 매우.
그 후로 나는 필기구를 쓸 때 어지간하면 제트 스트림을 쓴다. 울분과 설움이 담긴 내 나름의 저항 운동인 셈이다.


- 울분과 설움은 그것의 가치를 과장시킨다.

추억이라는 풍족이 만족감을 준다면, 울분과 설움이라는 결핍은 집착을 낳는다. 나를 따라오는 친숙한 집착은 사소한 말미라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과장시킨다. 본질을 보기 전에 그 겉을 에워버린 거품을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시중품’은 ‘애장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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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aid lunch, not launch


핵(Launch)실험만 생각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누가 오늘 점심(Lunch)은 내가 쏠게! 라고 한다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을 것이다. 그렇게 프레임은 강력하다.

한낮 사물도 이럴진데 살아 움직이는 대상은 어련할까.
매일 돈 문제로 싸우는 부모를 보며 자란 아이는 돈을 돈대로 보지 못 한다. 돈은 거래의 수단이 아닌, 없으면 갈등과 불행을 야기하는 거대한 무언가로 과장된다. 돈과 관련된 다양한 감정이 얽힌다. 어떤 이는 돈을 증오한다. 가진 자를 욕하고 그들의 소비를 무차별 비난한다. 가지고 가져도 불안하기에 끊임없이 비축한다. 아예 흥청망청 쓰며 반동 형성을 하기도 한다.
하는 일에 매번 비난과 지적을 받았던 아이는 자신의 기준을 무시한 채 타인의 기준에 따라 발버둥친다. 실패가 ‘바랐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을 넘어, 인생 전반의 실패 또는 자기 혐오의 양분이 된다. 실패하지 않으려 노력하나, 위축되고 경직된다. 해내도 만족하지 않고 허점을 찾아낸다. 성과 그 자체보단, 혼나지 않을만큼의 포장에 집중한다. 허영 속에서 안심한다.

학창 시절에 보면 “쟤는 정말 상종 가치도 없어. 완전 별로야.” 라고 생각되는 애도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경우가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궁금하겠으나, 답은 간단하다. 아무 상관 없거나, 참아낼 수 있거나, 내게 실제적인 이득이 있거나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나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그들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억하심정이 불러오는 '세상에 대한 프레임'에 명민하게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상황에서 걸림 없이 끄덕끄덕 함께 할 수 있는 넓고 둥근 사람이 된다면 편해지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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