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그림자
추억마저도 늙음으로 가려 들지 않는다
그때는 내가 나이든 줄을 몰랐다.
그저 마냥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다.
날이 지면 어둔 밤이 되고
새벽이 지나면 환한 아침이 오는 줄만 알았다.
나는 내가 늙은 줄도 미처 몰랐다.
그저 마냥 젊은 청춘인 줄만 알았다.
낙엽이 지면 설운 가을도 가고
눈보라가 치면 추운 겨울이 오는 줄만 알았다.
세월이라는 놈도,
그때는 내가 젊은 줄도 모르고
그저 마냥 한없이 같이 흐르는 줄만 알았다.
추억이라는 녀석도,
그때는 미처 늙은 줄도 모르고
그저 마냥 한없이 함께 하는 줄만 알았다.
그저 마냥 젊은 줄만 알았는데
이제는 그 젊음마저도 추억이 되고,
그저 마냥 흐르는 세월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는 그 추억마저도 늙음으로 가려 들지 않는다.
젊음과 늙음,
너와 나의 차이가 있기는 하느냐?
[세월의 그림자]
창가에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은 여전히 따스했다. 김 노인은 돋보기를 고쳐 쓰며 낡은 사진첩을 넘겼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빳빳한 칼라 셔츠를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라곤 없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내가 나이 든 줄을 몰랐다.
1. 영원할 것 같았던 낮과 밤
청년 시절의 그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았다. 해가 지면 어둠이 내리는 것은 내일의 태양을 맞이하기 위한 당연한 휴식이었고, 새벽의 서늘함은 곧 다가올 뜨거운 아침의 서곡일 뿐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계절이 자신을 위해 순환한다고 믿었다.
낙엽이 지면 그저 가을이 가는구나 싶어 서글픈 시 한 수를 읊었고, 눈보라가 치면 외투 깃을 세우며 겨울의 낭만을 즐겼다. 그 계절들이 하나둘 쌓여 자신의 얼굴에 깊은 골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2. 눈치 없는 동행자, 세월과 추억
"세월이라는 놈도 참 눈치가 없었지."
그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세월은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걷는 친구인 줄만 알았다. 가끔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영원히 함께 평행선을 달릴 줄 알았다. 추억이라는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사탕처럼 주머니 속에 가득 차 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세월은 친구의 가면을 쓴 도둑이었다. 그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세월은 그의 팽팽하던 피부와 날렵했던 걸음걸이를 하나둘 훔쳐 달아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머니 속의 사탕은 어느덧 딱딱하게 굳어버린 추억의 파편들이 되어 있었다.
3.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이제 그는 거울 앞에 선다. 젊음은 어느새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전설이 되었고, 그 자리를 늙음이라는 손님이 소리 없이 차지했다. 예전에는 '젊음'과 '늙음' 사이에 거대한 강이 흐르는 줄 알았다. 건너편에 있는 노인들을 보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라 치부했다.
하지만 이제 노인은 묻는다.
"젊음과 늙음, 너와 나의 차이가 있기는 하느냐?"
결국 젊음은 늙음의 시작이었고, 늙음은 젊음이 남긴 가장 진솔한 흔적이었다.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가 식어야만 열매가 맺히듯, 치기 어린 젊음이 저물고 나서야 비로소 인생이라는 한 권의 책이 완성되어가고 있음을 그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