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유객(28화)

다정한 망명자

by 씨킴


방랑유객



한 잔이라도 술을 마시는 날이면

여기저기 집구석을 방랑하는

한 유객이 있다.

사랑스런 아내의 사정도 그렇지만

곤한 잠을 깨우고 싶지 않은 그런 연유에서다.


그러면 동료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주거나

어느 피하지 못하는 집단이든지

애지중지한 가족 상사며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친구와의 밤이 되면,

나는 빈 거실이거나

제 방이 싫어 카페에 공부하러 간 아들녀석의 방이 아니면,

그런 나를 보고도 꼬리를 치는 개와

그의 집 으슥한 댁내에 쓰러져서 함께 잔다.


꿈은 드레스 룸에서나

여차하면 베란다 모퉁이에서도 자라며,

해맑은 가정의 현관이거나

간혹 아내와의 포근한 침실이 아니면,

딱딱한 소파라든지

고단한 책장의 한 귀퉁이에서...

그러면 맹렬히 흐르는 기세에 나는 꺾이지만

밤새 취한 속을 아른거리는 그 절절한 사연들의 회포로

도처에 방랑 중이라도 감내할 수가 있다.

집안에서도 나는 유객이 된다.














[다정한 망명자]


​도어록의 기계음이 고요한 집안의 정적을 깨뜨릴까 봐, 나는 숨을 죽인 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몸에서는 알싸한 소주 냄새와 사람들의 진득한 사연 냄새가 섞여 났다. 동료의 아픈 이별주였거나, 피할 수 없었던 조직의 회식, 혹은 수십 년 만에 만난 친구의 넋두리였을 것이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 집의 주인이 아닌 한 명의 '방랑유객'이 된다.

​안방에서는 아내가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 평화로운 숨소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의 방은 비어 있었다. 녀석은 아마 이 시간에도 카페 어디쯤에서 책장과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주인 없는 아들의 방에 발을 들였다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몸을 뉘기에 내 집은 너무도 깨끗하고 조용했다.


​"어이, 너뿐이구나."


​어둠 속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나를 반기는 것은 우리 집 강아지뿐이었다. 나는 녀석의 집 근처, 거실의 으슥한 구석에 대충 몸을 구부리고 앉았다. 아니, 어쩌면 녀석의 집 한 귀퉁이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꿈은 이 집안 도처에서 자라났다. 때로는 드레스 룸의 옷가지 사이에서, 때로는 찬바람이 새어드는 베란다 모퉁이에서. 아내와의 포근한 침실이 허락되지 않는 밤이면, 딱딱한 소파나 빽빽한 책장이 꽂힌 서재 귀퉁이가 나의 망명지가 되었다.

​세상의 거친 기세에 치여 몸은 꺾이고 속은 쓰라렸지만, 밤새 내 가슴을 적셨던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들을 떠올리면 이 불편한 방랑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들의 회포를 내 가슴에 담아왔으니,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조금 좁고 딱딱한들 어떠랴.

​나는 집이라는 성 안에서 스스로 유배를 선택한 객(客)이었다. 가족의 단잠을 지켜냈다는 안도감과, 밖에서 담아온 사람 냄새가 뒤섞인 채로 나는 소파 위에서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 햇살이 거실을 비추면 나는 다시 당당한 가장으로 깨어나겠지만, 오늘 밤만큼은 이 집안을 떠도는 가장 다정한 방랑자로 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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