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꽃(15화)

잊기 좋은 날

by 씨킴



이야기꽃



좋은 일도 잊히는데

좋지 않은 일은 더 잊을수록 좋다.

그러고 싶을 때는 금세 잊자.

반가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도 듣자.

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한번 들었다가 잊어버린 이야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몰래 귀기울여 듣자.

반가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며 금세 잊자.














[잊기 좋은 날]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기억이 있었다. 털어내려 할수록 먼지처럼 다시 내려앉아 마음을 뿌옇게 만들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그런 기억들. 나는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낡은 찻집의 문을 열었다.

​찻집 안쪽,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신기하게도 가슴을 옥죄던 비좁은 감정들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왔어? 얼굴이 왜 그렇게 수척해."


​그의 목소리에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좋은 일도 언젠가는 가물가물해지는 게 인생인데, 왜 좋지 않은 일들은 이토록 선명한 걸까. 나는 오늘, 그 지독한 선명함을 이곳에 두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특별할 것 없는 안부였고, 어제 먹은 점심 메뉴 같은 사소한 말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 마음속의 응어리를 꺼내 놓는 대신,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활기찬 문장들에 집중했다.

그는 신이 나서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꺼냈다. 군대에서 축구 했던 이야기, 첫사랑에게 퇴짜 맞았던 무용담들. 사실 나는 그 이야기를 이미 대여섯 번은 족히 들었다. 어디서 웃어야 할지, 어느 대목에서 손뼉을 쳐야 할지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몸을 숙였다.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 마디마디에 정성껏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 정말 그랬어?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나의 추임새에 신이 난 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났다.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파헤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쌓아 올렸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보니, 아까까지 나를 괴롭히던 '좋지 않은 일'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잊고 싶은 게 있을 때는 억지로 지우려 애쓰기보다, 반가운 사람의 목소리로 빈자리를 채우는 게 정답이었다. 그가 들려주는 낡은 이야기는 내 마음의 생채기를 덮어주는 보드라운 꽃잎 같았다.

찻집을 나설 때, 가방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솜사탕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을 기약했다. ​좋지 않은 일은 금세 잊기로 했다. 우리에겐 아직 피워내야 할 이야기꽃이 화단 가득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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