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좋은 날
이야기꽃
좋은 일도 잊히는데
좋지 않은 일은 더 잊을수록 좋다.
그러고 싶을 때는 금세 잊자.
반가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도 듣자.
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한번 들었다가 잊어버린 이야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몰래 귀기울여 듣자.
반가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며 금세 잊자.
[잊기 좋은 날]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기억이 있었다. 털어내려 할수록 먼지처럼 다시 내려앉아 마음을 뿌옇게 만들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그런 기억들. 나는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낡은 찻집의 문을 열었다.
찻집 안쪽,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신기하게도 가슴을 옥죄던 비좁은 감정들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왔어? 얼굴이 왜 그렇게 수척해."
그의 목소리에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좋은 일도 언젠가는 가물가물해지는 게 인생인데, 왜 좋지 않은 일들은 이토록 선명한 걸까. 나는 오늘, 그 지독한 선명함을 이곳에 두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특별할 것 없는 안부였고, 어제 먹은 점심 메뉴 같은 사소한 말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 마음속의 응어리를 꺼내 놓는 대신,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활기찬 문장들에 집중했다.
그는 신이 나서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꺼냈다. 군대에서 축구 했던 이야기, 첫사랑에게 퇴짜 맞았던 무용담들. 사실 나는 그 이야기를 이미 대여섯 번은 족히 들었다. 어디서 웃어야 할지, 어느 대목에서 손뼉을 쳐야 할지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몸을 숙였다.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 마디마디에 정성껏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 정말 그랬어?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나의 추임새에 신이 난 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났다.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파헤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쌓아 올렸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보니, 아까까지 나를 괴롭히던 '좋지 않은 일'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잊고 싶은 게 있을 때는 억지로 지우려 애쓰기보다, 반가운 사람의 목소리로 빈자리를 채우는 게 정답이었다. 그가 들려주는 낡은 이야기는 내 마음의 생채기를 덮어주는 보드라운 꽃잎 같았다.
찻집을 나설 때, 가방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솜사탕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을 기약했다. 좋지 않은 일은 금세 잊기로 했다. 우리에겐 아직 피워내야 할 이야기꽃이 화단 가득 남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