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暴雪), 그리고 빈칸
영화나 한 편
사랑은 침대에서 하는 것만도 아닌데
흰눈이 펑펑, 푹푹 내리어
일은 못 나가고,
애들도 없으니
마누라와 벌렁
침대에 누워
영화나 한 편...
[폭설(暴雪), 그리고 빈칸]
세상이 온통 하얀 침묵에 잠겼다. 새벽부터 쏟아진 눈은 무릎 높이까지 차올라 대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이 정도 눈이면 현장 일은 공쳤다. 예백은 눅눅한 작업복 대신 해진 내복 차림으로 창밖을 보았다. 펑펑, 혹은 푹푹.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위가 고요했다.
"일도 못 가는데, 뭘 그리 멍하니 서 있어요?"
주방에서 아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차를 들고 나왔다. 애들이 장성해 도시로 나간 뒤, 집안은 부쩍 넓고 적막해졌다. 예백은 아내의 손을 끌어당겨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사랑은 뭐 맨날 침대에서만 하는 건 줄 아나. 눈도 오는데 영화나 한 편 보자고."
예백의 투박한 말에 아내가 픽 웃으며 리모컨을 눌렀다. 낡은 TV 화면에서 오래된 영화의 전주곡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두꺼운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린 채 나란히 누웠다. 창밖의 흰 눈은 그들의 고단한 생업을 잠시 멈춰 세웠고, 그 빈자리에 모처럼의 평온이 들어찼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격정적으로 옷을 벗어 던지며 사랑을 속삭였다. 예백은 문득 곁에 누운 아내의 거친 손등을 보았다. 물일과 밭일에 마디가 굵어진 손.
'사랑은 알몸으로, 옷을 벗는다고 되는 일도 아닌데...'
예백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 같은 피부의 맞닿음이었다면, 지금의 사랑은 이 폭설 속에 함께 갇혀 체온을 나누는 이 고요한 부대낌에 가까웠다. 굳이 옷을 벗어 서로의 맨살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불 속에서 스치는 아내의 발꿈치가,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에게는 더 지독한 사랑의 증거였다.
"당신, 영화 안 보고 뭐해요?"
"그냥, 일 없으니까 영화나 한 편 찍어 볼까 하고."
"근데... 내 손은 왜 잡아요?"
"손이 좀 쉬나 싶어서."
예백은 쑥스러운 듯 아내의 손을 툭 쳤다. 아내는 못 이기는 척 예백의 팔을 베고 누웠다. TV 속 영화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지만, 침대 위 두 사람 사이엔 영화보다 더 깊고 눅진한 침묵이 흘렀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견뎌내는 것임을. 펑펑 내리는 눈이 지붕 위로 쌓이듯, 그들의 세월도 그렇게 서로의 위로 겹겹이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