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_올가 토카르추크 저_은행나무]를 읽고...
동물들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p.308 랄카의 시간 중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놓는다. 과거 때문에 고통받고, 그 고통을 미래로 끌고 가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절망을 창조한다. 하지만 랄카는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딜 뿐이다. 인간의 생각은 시간을 삼키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게걸스러운 흡입이다. 랄카는 신이 그린 정적인 그림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동물들에게 신은 화가이다.
p. 309 랄카의 시간 중에서...
"라떼는 말이야.. 세상 참 좋아졌어!"로 시작하는 유행어가 있다. 소위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들의 잔소리레퍼토리의 시작이다. 청년들을 향해 애정을 담았다고는 하나,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과거를 운운하며 현실을 재단할까? 그 해답을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나에게 생소했던 저자는 폴란드 작가로 201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짤막한 쪽글들은 하나의 패치워크를 이루고, 이 조각들이 모여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이 매력적인 책은 신화와 폴란드의 역사를 잘 버무리고 있다. 3대에 걸친 대가족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까지 독특한 이야기들을 선사한다.
'그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런 행동을 했지?' 지나고 나면 후회로 남을 만한 말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실수를 한다. 물론 대부분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고통으로 현실을 괴로워한다.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을 구분한다면 현재를 살면서 과거의 괴로움을 떠안고 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그렇다. 알면서도 떨칠 수 없기에 인간은 절망한다.
미래 시간의 종착지는 결국 죽음일 것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우리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 소설에서도 전쟁 때문이든 질병으로든 죽는 인물들이 나온다. 예상했던 죽음이건 급작스러운 죽음이건 죽음은 항상 두렵다. 이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시간의 흐름 앞에 앞서 나아가기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그 종착지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요즘 새치 염색을 중단했다. 코로나로 외부 활동을 멈추고 난 뒤 염색이나 화장을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회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에도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 생겼다. 게다가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염색을 해도 한 달이 채 안돼 흰머리가 다시 나오기 때문이다. 지독한 화학약품 때문에 따가워진 두피를 견디는 것도 지쳤다. 70대가 되어도 백발을 선호하지 않는 요즘 시대에 나름 독자노선이요, 어찌 보면 튀는 행동이다.
백세시대란 말이 나에게도 통용된다면 아직 50년이 더 남아있다. 그런 점에서 75세라는 나이에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해서, 현재는 세계적인 화가인 '모지스 할머니'가 계신다. 올해 독서동아리를 운영하면서, 글쓰기를 추가하였다. 책만 읽고 토론하던 프로그램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난 글쓰기에 재미를 느꼈고, 나의 미래를 채우는 조각보를 하나 더 만들고 있다. 태고의 시간들의 암캐, 랄카처럼 현실을 살고 싶다. 어쩌면 죽음에 한발 더 바짝 다가간 나의 모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매일매일의 시간들을 의미 있게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