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토퍼지(Autophagy)
"어이, 너. 너 말이야. 뭐? 널 부르냐고? 그래! 너. 한참 동안 불렀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 반응은 대체.... 이제야 알아차린 거냐? 하 참. 얼굴 시뻘게진 거 봐. 아주 꼴불견이라니깐. 그때 늦은 밤에 술집으로 들어갈 땐 아주 날쌔고 쌩쌩하던데. 그간 마신 술은 좀 깨셨나? 어떠셔. 기분이 날아갈 듯이 나아졌나? 길가에 나뒹굴어서 신문지로 대충 덮고 자기라도 한 건가? 뭘 멍해있나.
네가 날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적어도 표현 정도는 했으면 좋겠는데. 실망스럽군. 이 감옥에서 숨 넘어가게 몸을 이리저리 구르고만 있다고. 날 좀 봐. 어이. 이 줄이랑 손이랑 의자 좀 어떻게 해 봐.
... 잠깐만 나와 대화할 시간이 없단 말이냐. 단 5분... 아니, 그 이유로 널 불러 세운건 아니고. 넌 힘든 일은 수없이 해왔고, 하고 있고, 할 계획이면서 시간은 안 내어주겠단 거냐? 좋아, 몇 번이고 알려주지. 우린 전우라고? 원수가 되겠다면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아도 좋아. 다 포기하고 갈 길 가버리라고. 둘 중 하나가 완전히 사려져 버려도. 한 줌 재가 되어도 더 이상 후회는 없이 말이지. 참 이상적이지, 젠장. 이 몸을 이렇게 하대하면 속상하다고. 아아아아아...!"
창백한 여린 손에 두 눈이 가려진 웬 사내는 날 보고 입을 오물거리며 무어라 말을 했다. 그의 양손은 의자뒤로 강하게 묶여있었다. 스스로 풀어헤칠만한 껀덕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왠지 그가 익숙했다. 왜냐면 그는 다른 꿈에서 본 구속복의 사내와 이구비가 닮았기 때문이다. '아마 또 다른 죄를 지었겠지'하고 생각했다.
그의 고유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덧말을 붙일 여력이 없어졌으므로 잠자코 중얼거리는 걸 듣기로 했다. 귀를 열고 그의 '애정결핍 하이픈 다말증'을 듣노라면 이따금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물어뜯을 으름장을 부렸다. 마치 술에 취한 한량 놈과 강제 대면식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건 그는 자신이 제정신이라고 당당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피가 튄 수백 개의 낡은 타일, 깨진 유리창으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필라멘트가 다 되어 깜빡거리는 암실의 붉은 조명,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쇠감옥. 여긴 아마도 교도소 독방인 것 같았다. 그것도 지독히 고독한 방.
고기 썩은 누린내와 피비린내가 푹 패인 작은 배수구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 코를 막았다. 내 앞의 사내는 무엇이 웃기는지 나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광인을 빙자한 자가 편히 사는 날 괜히 꼬집어 헛바람을 넣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믿고 싶었다. 눈이 가려져도 어렴풋이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야생의 눈이 진실만을 말한다고 믿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가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날 위한 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뱉는 것으로 말이다.
"괜한 의심 따윈 하지 말란 말이다. 의심 뭐 그깟게 한 줌 희망에 비벼질까 봐. 누가 의심해도 된다고 그러나, 응? 그놈의 의심이 문제지... 의심. 응? 의심이 무어냐. 순수함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 아닌가. 순수해지지 않길 원한다면 의심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좋다. 그래, 날 의심하면 무엇이 좋지?"
나는 그의 질문에 즉각 대답할 준비를 했다. 아무 망설임 없이.
"의심은 필요해. 어느 상황에나 대비하자는 거지. 최소한의 플랜 B가이 있어야 예상치 못한 변수에 금방 적응할 수 있거든. 순수함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의심이? 난 동의 못 해.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겠어. 나는 전체의 3할에 동일하게 의심하기에 그나마 옳은 길을 택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해."
나름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자에 묶인 그는 고개를 빠르게 내저으며 죽어도 동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전히 화가 많이 나 있는 것 같았다.
"하! 속 편하게만 살았군. 그렇게 도망쳐서야 뭐가 나오나? 보물? 돈? 그런 식으로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했다간 큰코다칠게 뻔하지. 내가 의심을 지우고 얻어낸 건 바로 무한한 자신감이야! 보물이나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영석같은 거야. 파리 소리따윈 신경 끄는 기특한 마법이지!!"
그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때때로 심사숙고할 필요는 있는 법이야. 자신감 하나 믿고 집에 처에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허다하지. 그런 우발적인 결정에 모든 걸 맡기다가는 자신감이 되레 독이 될 수 있어. 작은 문제를 개의치 않는 건 좋지만 모든 사건에 따르는 리스크를 줄이는 연습이 경험에 축적되어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지. 빠르지 않아도 돼. 사려가면서 체력과 정신력을 장기적으로 보전하는 편이 더 길게 갈 거야. 말하자면 마일리지 같은 거지."
우리 사이에는 한 치 양보할 수 없는 대화가 오갔다. 그는 아무래도 내 고질적인 사상을 바꾸고 싶은 모양이다. 한 번 무너지면 이 자에게 굴복한 무책임한 삶을 살겠지... 어떤 말로도 나는 나만의 철학을 굳건히 지키고 싶다. 그가 어떤 존재이건. 이 암울하고 공허한 공간이 진실만을 말하는 내 무의식이라면...! 나는 추호도 이 사람을 밖으로 꺼내지 않을 테다. 이 사람이 날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임감 있는 말투도 아니거니와 친절함은 눈곱만큼 있지도 않다. 인정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차분한 사람이면 모르겠다. 그러다 탁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네 삶을 줄곧 지켜보았다. 그러나 네겐 자신감이 부족해. 그러니까 조언을 구하고 싶거든 날 찾아와."
"아니, 난 이미 너의 처지를 수년간 살았어. 난 널 이용할 거야. 즉 넌 나의 과오이자 과거야. 네 오만한 생각은 진작에 꿰찼으니까."
그는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마치 내 생각을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게다가 엄청난 분에 찼는지 의자를 끌며 소리쳤다. 다행히 그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두 귀는 이미 잃었으니까. 그가 아무리 고함을 쳐도 소용없었다.
그의 눈을 가린 두 손 중 왼손이 그의 입을 막았고 한쪽 눈이 보였다. 눈꺼풀이 머금던 피가 줄줄 흘러 충혈된 왼눈을 더욱 끔찍하게 만든 것만 같았다.
그를 더 지켜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기심에 질투가 나 제 분을 못 참는 다라... 저 사람은 내가 영영 꺼내주지 않을까 봐 의심하며 분노하겠지.
시간을 주자. 분을 삭일만한 맛있는 것도 가져와야겠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감옥을 뒤로하고 암흑만 있는 곳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 공간을 나오자 찬 물이 얼굴에 시원하게 감겼다. 턱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은 붉게 혼탁해지고 있었다. 면도를 끝내자마자 선 채로 잠시 잠에 들었나.
뒤를 돌아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아주 말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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