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서 창가를 바라보는 것이 삶이다
2024년 11월, 국토대장정 계획을 진행했고, 2024년 12월, 45년 만에 비상계엄령이 떨어졌다. 처음엔 놀랐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위해 하루가량 시간을 들여 검색 수많은 정보를 입수, 윤 전 대통령의 의도를 머잖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며칠 뒤 국토대장정을 떠나는 것을 강행했다. 일을 하면서 쉬고 싶은 때는 별로 없었다. 큰돈을 들여 여행을 떠나고, 자연을 가까이하는 모든 도피행동.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한층 더 성장하고자 하는 의의를 다지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정신과 몸의 훈련을 필요로 횅 떠나게 되었다. 여자친구는 아팠지만, 이내 괜찮아졌다며 둘은 평생 해보고 싶은 것을 하나둘 해보기로 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국토대장정 첫날, 오지의 촌길을 걷다가 길들여지지 않은 떠돌이 개를 따돌리고, 간식으로 간단한 요깃거리를 하며 밤길을 서두르기도, 모난 길퉁이를 한참 헤매다 때마침 마을에 사시는 귀인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추후 이 당시 찍은 사진과 영상은 모두 유튜브에 게시할 예정이다. (다친 이후로 미룬 모든 일 정리하는 중) 세상에는 감사할 일이 이토록 많은데 나는 왜 몰랐을까? 남자는 30대가 되면 철이 든다지만 나는 영영 철들지 못한 어린아이로 남고 싶다. 살아서 감사하다는 감동의 순간들을 하루도 놓고 싶지 않다.
아이의 마음, 순수한 영역에 머무르기를 바라기보다 순수함을 내 그릇 안에 담는 것이 아이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강력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담배와 술을 끊겠다고 다짐, 남은 삶에 회복을 간절히 요한 순간, 다시 한번 삶의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 이후 감각이 차차 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오래도록 원하던 것들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기상, 취침, 식전, 식후, 외출 시에 기도도 빼놓지 않는다.
국토대장정을 마친 후 우리는 한동안 국토대장정 얘기뿐이었다. 모아둔 돈을 모두 써버렸으니 다시 일을 구해야 했다. 이력서를 돌리고, 넣은 건 170개가량 될 것이다.(그 이상인 듯)
집으로 돌아온 후 차를 끌고 해운대에 갔다. 엄청 큰 빌딩의 15층에서 면접을 보았고, 사업자 계약을 했다. 이후 택배업을 시작해 초반 3개월 적응기간은 정말이지 지옥이었다. 평소 운동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매일 등산을 하던 때와 다르게 집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보니 체력은 자연히 바닥이었다. 그 상태에서 언덕과 계단 수십 개를 오르고, 모르는 주소지를 찾으러 한참 헤매는 짓을 반복하다 몸에 힘이 빠져 이틀가량 쉬기도 했다. 어느 날은 굴을 배송했는데 2시간 뒤 집주인이 연락을 했다. '이건 상온에 너무 오래 있었다' 도로 가져가라고 하셨는데 결국 클레임 맞았다. 결국 물건은 재신청하고 해당 물품은 처리가 어려워 당분간 조수석에 두기로 했는데 그땐 35도에 육박한 한여름이었다.
며칠 뒤 몸에 힘이 서서히 빠지더니 배와 머리가 자주 아팠고, 기어이 배송 중 화장실을 찾는 변수가 생겼다. (평소 시업 중 해결을 미리 하는 편) 장에 문제가 생겼는지 혈변을 보고, 결국 이틀을 쉬어야 했다. 죽만 먹는 일주일을 보내면서 동시에 일주일 치 복용약을 섭취하고, 긴 휴식 후에야 차츰 나아질 수 있었다. 물론 굴은 음식찌꺼기 통에 부어 처리했다.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약 3일간 주방에서 썩은 굴냄새가 빠지지 않아 향수를 뿌리며 아침을 열었다.
또 어느 날은 비가 억세게 내렸다. 미역과 김치가 담긴 큰 아이스박스 한쪽이 깨져버려 미역을 온몸에 쏟았다. 배송지는 빌라 4층이었고, 거기에 올라가는 동안 비에 홀딱 젖은 미역남의 상태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말도 안 되는 내 꼴에 미친 듯이 웃음이 났다) 물건을 받을 고객님께 전화드려 미리 양해를 구해 받겠다고 하셨지만 그 옆에 계시던 아저씨는 대뜸 화를 내며 욕을 했고, 축 처진 어깨로 계단을 내려가면서 안경이 다른 빗물에 젖어가는 걸 느꼈다.
올해 10월 초, 좌측 발목인대(총 3군데)가 모두 파열되어 3개월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자친구도 결핵치료 중 손상에 의한 폐기흉으로 꼼짝없이 병원에 갇혀 치료만 받게 되었다. 다행히 둘은 수술을 무사히 이겨냈다. 이번 12월이 가면 모든 치료는 잘 끝날 것이다. 현재는 나만 물리치료를 주 2회 받고 있다. 게다가 컴활 1급 공부 중이고, 곧 있으면 시험이다. 평범하게 걸어 다닐 수는 있지만 보조기 없이는 무리이고, 힘이 달리는 듯하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장애최하등급을 받게 될 것이라 하셨다. 놀랍지도 않다.
몸이 나아질 즈음 쌓여가는 억대의 대출을 누르는 카드빚과 치료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기쁜 일이 있어도 기뻐할 수 없었고, 나라는 체제전복위기. 당장에 비상계엄 이후 약 1년이 되도록 집안 경제력은 한없이 저조해져만 갔다. 노답종합세트로 깜짝 찾아온 불안에 병실침대에서 공황장애를 또다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치료만 받다가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라고 했던가.
5~7년간 연락이 되지 않던 여자친구의 어머니는 어떤 연유로 병문안을 오셨고,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님과 남동생의 도움으로 여자친구의 병원비는 가뿐히 면할 수 있었고, 차후 직장을 구하면 되갚아주기로 했다. 새로 생긴 인연으로 먹을 게 없던 우리 집에 음식이 쌓여 줄어지지 않았고, 배고픈 날이 언제인지 잊게 되었다. 게다가 여자친구의 남동생은 공기업을 다니고 있었는데 상공회의소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된 나는 공부에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만 돈을 벌 수밖에 없었고,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 어려운 기질임을 스스로가 잘 알기에 기회는 이때뿐이라고 생각했다. (고교시절 대학진학을 희망, 약 8년 후 일과 대학을 하려 했으나 한 가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어 모두 그르침) 달마다 내는 생활유지비와 병원비만 처리된다면 당장 해결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내 삶을 재정립하는 것. (바쁘면 분기별 혹은 매일 해야한다고 생각, 어느덧 일년치가 다 되어갔다)
택배 일을 하면서 돈은 제법 벌었지만 매일 반시체가 되어 귀가하면 씻자마자 잠이 왔고, 글을 쓰는 건 도무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쉬는 날 간헐적으로 브런치를 쓰곤 했는데 그마저도 잘 안 되었던 건 악한 습관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잘 되길 바라지, 삐딱선을 영원히 타는 건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젠 정말 괜찮다.
나는 담배를 완전히 끊었고, 술도 먹지 않는다. 매일 아침 과일을 먹고 배달음식을 먹지 않는다. 요리와 운동을 매일 하고, 다양한 콘텐츠 생산 앱을 탐구하고 연구 중이다. 블로그 포스팅 계획서도 마쳤고. 완료한 밀린 다이어리, 일기, 자기 계발서, 파일정리, 향후 공부계획, 앞으로 딸 자격증과 대학 재진학 계획, 수입 관리, 가족 여행, 건강 관리, 생활 개선 등에 새로운 관심이 있다. 내 회복력은 마치 우리 집 창가에 사는 몬스테라와 같아졌다. 카드빚과 의료지원, 국비지원 투자, 보험설계 등을 조정하는 방법을 올해 2025년을 통해 배웠고, 이제 탈탈 털고 걸어갈 일만 남았다. 달리다간 또 발목 부러지니까.
세상 모든 책 속의 사람들과 현재를 함께 사는 모두 각자의 미래에 풍요와 행복과 건강을 바란다!
그리고 내 삶이 증명한다! 죽음을 쉽게 선택하지 않는 한 삶은 더욱 재미있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