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나면 부모님으로부터 생일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는다. 아기나 아이들은 자기 생일이 다가오면 부모님께 선물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떼를 쓴다. 떼를 쓰는 건 아마 청소년기 아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생일은 일반 가정집에서 자란 분들과는 달리 평범하지 않았다. 흡사 잔치나 행사처럼 군중 속에서 생일파티가 이뤄졌다.
송년회는 테이블 위에 다과를 놓고 무대에 MC를 초청하여 행사를 거행한다. 행사 진행이 끝나면 뷔페식이 끝난 뒤에 식을 마친다. 일반인의 생일은 MC도 없고, 식을 진행하는 사내 임원이 있지 않다. 다만, 그 요소들을 빼면 내가 보육원에서 보냈던 생일과 비슷했다.
1월 24일은 평범한 나의 생일이고, 처음 기억하는 생일은 여덟 살 때이다. 여덟 살 이전의 사진은 겨우 두 장뿐이다. 하얗고 거친 글씨로 쓰인 'RED'. 양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반다나를 머리에 둘러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사진, 유치원 졸업식 때 세 명의 친구들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올려다본 사진. 두 사진을 지긋이 내려다보자 철장 속에잠겨져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고, 힘겨운 날마다 아련하게 보았던 사진들은 내 삶에 버팀목 이 되어주었다.
나는 유아기부터 유년기, 그리고 소년기까지 보육원에서 쭉 생활해 왔다. 생활실 내부는 대체로 다툼이 잦았던 곳이었다. 만일, 싸움이 발생하면 교육을 명목으로 우리는 때에 따라 전원 훈계를 받기도 했다. 우리는 생활원이라는 정원에 서식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1월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따뜻한 겨울이었다. 며칠 전부터 내려 덤불처럼 쌓인 눈이 풀장 변두리와 길 구석지에 뭉쳐져 있어, 나는 그것을 창에서 내려다볼 때 포근한 한기를 느꼈다. 중천에 떠있는 해는 서서히 얼음으로 변한 눈을 녹여내었다. 신정이어도 다량의 눈이 안 내렸기에 우리들이 직접 눈을 치워야 하는 걱정은 덜어졌다. 머잖아진눈깨비가 차차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산한 새벽이 되면 줄곧 잘 일어나는 편이었다.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로 가는 도중 무심코 5층 높이에서 창밖을 내려다보곤 했다. 수위실의 누런 불에 비친 삽을 들고 나오는 수위아저씨가 보였다. 수위아저씨는 묵묵하게 제 일을 잘 해내는 멋진 어른이었다. 쌓인 눈을 한 줄씩 미는 모습이 마치 목표를 정하고 하나씩 처리하는 게 그저 멋있었다. 눈이 잘 쌓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격주로 돌아오는 수요일은 수(水) 요일이므로 수영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깰 때부터 친구들은 이미 수영장에 도착한 듯이 들떠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여름방학 숙제를 먼저 끝내는 순서대로 수영장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영하기에 앞서 나는 편식이 심해 밥을 편안히 잘 먹지 못했다. 음식을 잘 씹지도 못할뿐더러 씹은 음식을 (사실, 제대로 씹지도 않았지만) 목 뒤로 삼키는 과정 자체가 어려웠다. 이것은 꽤 오랜 불안정한 습관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님에 따르면, 아이가 음식을 잘 먹도록 돕기 위해서는 식사시간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린아이일수록 질식에 대한 공포가 커 음식을 삼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안법은 '아이가 음식을 잘 섭취하게끔 도와주는 것이고, 식사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어릴수록 공포가 크다는 것은 정신이 예민하며 안정적이지 않으므로 신심이 민감하다는 뜻이다.
나는 촉각이 매우 예민한 아이였다.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별다른 이유 없이 싸움을 시작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에 내키는 기분대로 행동한 것도 많이 예민해서였다.
'어떻게 하면 예민한 아이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우선 아이가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주변환경을 설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으로 변화를 주기 위해선 아이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어른의 주된 관심과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식사하는 공간을 아이가 편하게 느끼는 공간으로 만들어 주고, 웃는 얼굴로 대화하고, 큰 음식을 작게 잘라주는 것이다. '난 항상 네 곁에 있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가 그 감정을 느끼고 편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방법이다. 여유 있는 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몬스테라 화분을 식사자리에서 보이는 곳에 들여놓는다던지, 보드라운 상아색 커튼으로 창문을 살며시 가리던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아이 스스로 밥을 잘 먹을 수 있게 각자로서의 의견을 물어보고 생각할 수 있게 여유를 가지는 것이 예민한 아이들을 도우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의 식사시간은 대부분 우중충 했다. 정해진 식사시간에 밥을 다 먹지 못해 복도로 쫓겨나 음식이 담긴 큰 사기 접시를 든 채로 엉엉 울며 11시가 넘도록 차갑게 식은 밥을 먹은 때가 있었다. 편식은 생활했던 시설의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처럼 좋지 않은 버릇은 훈계와 매를 맞아가면서 천천히 고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은 기분 좋게 잘 먹었다. 아침밥은 고소한 야채죽과 김장김치, 꼬들꼬들하고 달콤한 무말랭이가 나왔다. 시뻘건 볶음멸치도 나왔다. 이가 약해 딱딱한 음식을 잘 씹지 못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야채죽에 멸치볶음을 말으면 멸치가 눅눅해졌고 씹기에 편했다. 밥을 '잘 못 먹는' 입장에서 그날의 아침밥은 부드럽고 삼키기 쉬워서 괜히 더 맛있었다. 경험이란 반찬을 인생이라는 몸에 꼭꼭 눌러 보양하는 것처럼, 앞으로의 우리 인생의 반찬이 만족스러운 만찬이 되길 바랐다.
식사 후 엄마 수녀님은 분홍 꽃무늬 자루에서 수영모와 수영 바지를 꺼내 우리에게 나누어주셨다. 배급받은 물품에는 각 생활자의 이름이 매직 마카로 쓰여있었다. 간혹 남의 것을 빼앗는 애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수영모를 돌려받아야 했다. 수영모 없이 수영장에 입장한다는 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어찌 됐건 물건 간수는 자신의 책임이 따를 터였다.
"수영모 내놔."
"치, 내가 언제 네 걸 뺏었냐?"
분쟁의 주도자를 따질 새도 없이 물건하나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UFC 매치가 성사가 되고 난 뒤 접견타임에 우발적으로 주먹을 내치는 선수처럼 말이다. 그럴 땐 의료팀과 매니지먼트팀이 대기하여 선수를 관리하겠지만 만일 외딴곳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간 엄마수녀님의 거침없는 등짝 스매시가 제지할 예정이었다.
어른이 근처에 있으면 어그러진 상황은 쏜살같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어른이 없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서로 할퀴거나, 팔을 물어뜯거나, 맞지 않는 주먹질을 산성비처럼 수평으로 퍼부었다. 나는 허공에 주먹을 잘 날리는 고수였다. 애석하게도 자리를 메꿀만한 중요한 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친구가 싸움을 시작해도, 내가 시작해도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벌어지는 행동이 장난인지, 사고인지 모를 일들이 참 많았다. 싸우는 언성이 높아지면 수녀님은 무서운 심판의 표정으로 우리들을 번갈아 보았다. 지레 겁을 먹은우린 매치을 포기한 채 물안경을 쥐고 생활실을 떠나야 했다.
수영장으로 가는 길은 정말 가까웠다. 생활하는 건물로부터 약 삼백미터만 걸어가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수영장 앞에 수압 펌프를 관리하는 관제실이 있었고, 그 앞에 탁구 경기장만 한 공간이 있었다.
공터의 수호를 관장하는 네 명의 사내 대장군들. 그들은 보육시설을 관리하는 대표기사님들이었다. 남자 기사님들은 총 다섯 분, 혹은 그 이상이었지만,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교체 선수까지 해서 다섯 명 정도였다. 오리버스 기사 아저씨와 불고기 아저씨, 수영장 아저씨, 목공소 아저씨가 2인 1조로 한 팀을 이뤄 족구를 즐기고 있었다. 심판석에는 언제나 그랬듯 윤 씨 기사아저씨가 앉아계셨다. 우리끼리는 그 스포츠를 발탁구라고 했지만, 정식 스포츠명은 족구라고 한다. 친구들은 알록달록한 페인트로 칠해진 낡은 난관을 붙잡고 '우리 팀 이겨라~!'라고 외치며 재미있게 구경하곤 했다.
폐품을 버리러 갈 때, 수영하러 갈 때, 점심밥을 먹고 학교로 다시 올라갈 때, 산으로 갈 때. 네 명의 아저씨를 응원하는 관객은 주로 우리 초등학생들이 도맡았다. 이따금 보육교사 선생님도 아이 같은 마음으로 나란히 구경하셨다. 관리실을 지나쳐 다른 장소로 가기 전, 아이들이 이곳으로 몰리는 이유가 족구 구경이었다. 그만큼 족구 경기는 흔하지만 이벤트성 경기이기에 눈에 띌 때마다 응원에 참여했다.
친구들은 수영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갈아입을 옷을 보관할 사물함에 잠금장치 따위는 없었다. 하여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등 작은 사건사고도 빈번히 일어났다. 그런 행위를 두고 우리는 '닦았다(훔치다), 닦였다(도난당했다)'라고 명명했다. 발탁구에 빠져든 아이들은 한창 집중하다 보니 '수영장에 가야 할 생각'이 잠시 닦이기도 했다.
초등학교는 초등부와 고등부가 있다. 1~3학년은 초등부, 4~6학년은 고등부. 수영장 내부는 두 개의 풀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구와 가까이 있는 얕은 풀장은 초등부, 그 옆에는 수심 2M의 고등부 전용 풀장이 있다.
우리 같은 꼬맹이가 고등부 전용 풀장으로 가면 당연히 안 좋은 사달이 날 것이기에 서로가 그곳으로 가는 걸 막았다. 때때로 대담한 애는 수녀님이나 보육선생님이 잠시 없는 틈을 타(우리가 생활실 밖으로 나갈 때 보호자로 수녀님 또는 보육선생님이 동반하신다)수영은 서로 물 뿌리기 아니면 개인 연습으로 끝이 났다. 물 뿌리기는 물장구, 물대포, 물벼락 같은 여러 기술을 통합해 가리키는 '공격기술'이다. 특급 히어로 체험장인 수영장에서는 닥터 스트레인저의 꿈나무가 참 많았다. 수영장 변두리에 한 번씩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지만, 초등학생들에게 주의란 사치였다.
한 팔이 물에 들어갈 때 다른 팔을 번갈아 가로지르면서 다리를 굴러 앞으로 나아가는 '자유형 연습'. 엎은 자세에서 두 팔로 원을 그려 개구리처럼 다리를 접었다 펴는 '접영 연습'. 몸이 뒤집힌 상태에서 팔을 물레방아 돌리듯 거꾸로 돌리고, 다리를 구르면 '배영 연습'이다.
우리는 주로 자유형과 배영, 잠수 연습을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유독 몸집이 작았기에 작은 풀장에서 연습을 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초등학생 3학년이 되면, 저학년의 막바지에 이르는데 이때부터는 정식적으로 큰 풀장에서 놀 수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수영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교습을 듣고 있노라면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신비로운 경험을 마주했다. 사소하고 다양한 모든 경험들은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한 '밑장 넣기'였다. 어느 누구도 아이의 호기심을 가둘 수 없는 건 만국공통의 불가사의가 아닐까.
수영이 끝나면 지퍼백 속에 미니어처 샴푸앰플과 비누를 샤워실로 가져와 머리를 감고 몸을 박박 씻었다. 행여 수영장 소독물 냄새가 몸에 배길까 오랫동안 샤워실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그 친구는 높은 확률로 지각생이 되었다.
뜨뜻한 물을 끄는 것만으로도 무지 귀찮았었지만, 혼나지 않으려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발맞춰야 했다. 나올 준비가 끝나면 우리들은 냅다 생활실 건물로 달려갔다. 겨울이라 수영장 입구부터 퍼런 입술을 덜덜 떨면서 비탈이 심한 언덕길을 내려왔다. 언덕길을 뛰어내려오는 도중에 넘어지는 걱정은 접어두었다. 평범한 일상이니까. 뼈가 부러지거나, 이빨이 깨지거나, 피가 많이 나지 않으면 괜찮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또 넘어지고 다시 달려갔다. 다시 돌아가야 할,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해 준 집으로.
시설 현관(느티나무 앞 중간문)에 들어서게 되면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내기'가 시작되었다. 보상은 고무로 된 딱지였다. 각자 호주머니에는 소설 <아가미>의 주인공 곤의 등비늘처럼 반짝거리는 고무딱지가 빵빵한 건빵처럼 들어있었다. 내기에서 지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고무딱지를 넘겨야만 승리에 대한 보상이 주어졌다. 지지 않기 위한 방법은 오직, 5층에 도착할 때까지. 생활실에 도착할 때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야만 했다. 빼앗고 싶으면 빨리 가야 했고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 빨리 가야 했다.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올라왔기에 가쁜 숨을 뱉는 동시에 먼저 파란 빨래 통을 찾았다. 지퍼백을 열어 젖은 수영복을 담자 갑자기 피로한 몸이 무언가로부터 뒤로 끌려갔다. 입구 컷! 세 명의 친구들은 인질극처럼 작은 몸뚱어리를 붙잡고 복도 저 멀리까지 나를 끌고 갔다. 화가 났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붙든 팔을 쉽게 놓지 않았다. 개울가 올챙이를 놓지 않겠다는 신념과 각오를 어디 지원서에 써 놓은 모양이었다. 약 5분 뒤, 생활실 안에 있던 한 친구가 생활실 문을 열면서 모두 방으로 오라고 했다. 아이들은 나를 내팽개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어이가 없어 찬 바닥을 짚고 일어나 온기 가득한 생활실로 따라 들어갔다. 하얀 유리 문간을 넘으면 창문을 통해 생활실 안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들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보면 모를 줄 알았지?'
낮은 창문을 넘보는 것은 어려운 일. 까치발을 들어봐도 간신히 점프를 뛰어야 볼 수 있는 내부는 천장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던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불이익을 인정하고 '생활실 입구로 되돌아와 생활실 문을 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생일케이크 팡파르를 터뜨리며 생활실 입구에서 반갑게 맞이했다. 눈앞에 장난기 어린 동갑내기들이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누구인지.', '당신들은 대체 누구인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 오랜 시간 동거 동락했던 어린 시절과의 만남이었다. 진심으로 나를 믿어주고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들의 최종 거처이자 안전지대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이주호~ 생일 축하합니다~!!"
기뻤다. 그 경험은 공허한 마음을 빈틈없이 채워준 남는 행복이었기에 복에 겨워 눈물 흘릴 줄도 몰랐던 철부지를 파랗게 덮었다. 첫 생일파티를 떠올려보면 그토록 가슴 벅찬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엄마 수녀님과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공부시간엔 공책이 올려져 있어서 지루했지만, 생일에는 음료수와 과자, 햄버거를 보는 것만으로 충만히 호기로워 보였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생활반의 생일 축하는 친구들과 돈독해지게 된 계기이다.
2002년 1월 24일,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었다.
그날 저녁, 나는 펜을 붙잡고 그림공책에 일기를 썼다. 일기장에 그려진 아이는 세상 풍파를 겪고도 살아남은 갈대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때를 상기할 때마다 미소는 심장을 시큰거리게 했고 에밀레종의 울림에 준한 넋두리를 뱉었다. 여덟 살이 되어 아픔의 원인을 알게 되었고, 첫 생일을 떠올릴 때면 아이처럼 울었다. 그 기억이 좋아서 울었다. 철 없이 살았던 그때가 정말 그리웠다. 친구들과 싸워도 금방 다시 친해졌던,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 알았던, 살아가는 것에 진득한 호기심을 가지고 재미있어하던 소중한 시절이.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이면 내 눈빛의 명암은 자주 뒤바뀌었다. 어떠한 곤욕을 겪어도 매사에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는 마음으로. '아이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강렬하고도 충격적인 안목을 준 신과 스티븐 호킹께 뼈저리게 감사했다. 고마워요. 모두들. 엄마들. 친구들. 그리고 우리들의 아버지. 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