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시작이 교차한 순간
잠결에 전화기를 보니
부재중 통화가 여러 통 와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언니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언니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안 놀랠 수가 있겠습니까.
언니는 저를 데리러 올 테니
아버지가 계신 지방의 큰 병원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새벽 기차를 타고 부랴부랴 그 병원으로 가니
중환자실에 인공호흡기를 달고
죽은 송장처럼 누워계신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담당의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지주막하출혈이라 온 뇌가 전부 피로 뒤덮여 있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깨어나지 못한다고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는 저희를 기다리셨던 걸까요?
보통 지주막하출혈로 응급실에 오면
대부분 얼마 안 가서 숨이 멎어버리는데,
아버지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여
생물학적으로는 살아계셨으니까요.
담당의도 그게 신기하다며 얘기하더군요.
정신없는 와중에
약학대학 지원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중환자실 앞의 벤치에서
컴퓨터를 열어 지원서를 업로드했습니다.
참.. 이게 무슨 일인지.
중환자실 앞에서 입시 준비를 하다니요.
하필이면 또 쓰러지신 후 며칠 뒤
아버지 생신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 선물을 어머니께 드리고
아버지께서 극적으로 깨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병원에서 숙식하기를 이틀쯤 되었을까요.
담당의는 갑자기 저희를 호출하더니
아버지 몸에서 소변이 안 나온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날 밤 아버지께서는 새벽에
하늘의 별이 되셨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 아니, 어쩌면 아버지께서
기적을 양보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한 달 뒤,
약학대학 입시에서 E 학교에 합격하게 됩니다.
아버지 49재에 E 학교 약학대학 합격통지서를
제사상에 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아마.. 살아계셨더라면 좋아하셨겠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집안의 수입이 완전히 끊겨버렸기 때문에
저의 집안 소득 분위는 1 분위였습니다.
E 학교는 가계 소득 5 분위까지
전액 장학금 혜택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E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약학대학을 졸업하여
어엿한 약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남기신 빚도
매달 갚는 중입니다.
아버지의 부재와 약학대학 합격은
제 인생에서 가장 극명하게 교차한 사건이었습니다.
상실의 깊은 어둠 속에서도
삶은 저를 다시 앞으로 밀어냈습니다.
이제 저는 약국을 운영하며
매달 아버지께서 남기신 빚을 갚아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손님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버지가 계셨다면
이 자리에서 어떻게 웃으셨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양보하신 기적 덕분에
저는 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겁지만 분명한 제 삶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음속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버지, 저는 여전히 잘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요.
돌이켜보면 제 삶은 늘 치열한 생존의 연속이었습니다.
‘공부 잘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해,
끝없는 입시 경쟁과 대학, 그리고 취업의 벽까지.
때론 쓰러지고, 때론 버텨내며,
그 과정에서 제 안의 상처와 결핍을 수없이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실패는 저를 단단하게 했고, 상실은 제 마음을 깊게 만들었으며,
작은 성취와 우연한 기회들은 제게 다시 살아낼 힘을 주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지난날은
결국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치열했던 경쟁 속에서도 누군가의 따뜻한 말에 위로받았고,
상실의 깊은 어둠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만났습니다.
이제 저는 ‘대한민국 생존기’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이 이야기를 뒤로 하고,
생존을 넘어 ‘삶’을 온전히 누리는 법을 배우려 합니다.
더 이상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저 다운 길을 걸으며 사랑하고
나누고 쓰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쓴 이 기록이,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은 덜 외롭게 하고,
조금은 더 단단하게 지켜주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