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의 협상
그런 날이 있습니다.
나의 존재 자체에 의구심이 드는 날.
나는 왜 이런 성별과 이런 몸, 이런 얼굴로
이런 저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지
조물주 앞에서 진상부리고 싶은 날.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이미 결과가 결정되어 버린 것 앞에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무력감으로
하루가 채워지는 그런 날.
길거리에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행복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는 그 행복이 참으로 값비싸다는 걸
느끼게 되는 그런 날.
이미 금 가버려 조금 있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의 댐(dam)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라는 얄팍한 땜질로
그동안 참 많이도 언 발에 오줌 누듯이
하루하루를 버텨왔습니다.
어제도 땜질을 해보려고 했더니
감정의 댐 수위가 너무 높아졌는지
그냥 터저버렸습니다.
그 다음 날이 쉬는 날이 아닌데도
쉬이 잠은 오지 않고,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는 소리와
저의 숨 쉬는 소리만이
적막한 새벽을 채웠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어렸더라면
이런 날에 밤을 샜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지치고 닳아버려
밤을 새는 건 아예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K-자영업자가 되어버린 몸이라
이런 날에도 내일 출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제 내면을 한 껏 채운 우울감과 협상을 했습니다.
'내일은 일찍 퇴근하는 날이니까, 저녁부터 우울할 수 있어.
내일 저녁부터 우울하기로 하고, 지금은 자게 해줘'
협상이 마음이 들었는지
우울감은 잠시 제 마음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게 겨우 잠들며 생각했습니다.
이건 패배가 아니라 생존일지도 모른다고.
지금은 그저, 내 안의 어둠과도
타협하며 살아가는 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