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때 모든 영화를 하나의 잣대로 바라봤던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라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하며, 서사적으로 완벽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허나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바뀌어갔습니다. 서사적으로 완벽하다한들 공포영화가 무섭지 않고, 액션영화의 액션이 별로라면 정말 그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다소 부족한 요소가 있더라도 영화의 제작 의도를 충족시킨다면 충분히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의 제작 의도는 새로운 팬층의 유입과 기존 팬층의 만족이었으며, 해당 영화는 이를 비교적 만족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액션을 비롯한 시각적 효과와 유입 관객을 위한 프리퀄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액션과 시각적 효과
이 영화는 액션과 관련된 효과가 상당히 뛰어납니다. 그림체 역시 훌륭하고 몰입감을 이끌어내는 사운드의 역할도 상당히 컸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깊었던 부분들은 액션의 타이밍과 그림의 선인데요.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액션 타이밍 조절로 인상깊은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영화 <주술회전: 0>의 액션은 집중 대상과 배경의 속도에 일부러 차이를 주는 장면이 많습니다.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전체적인 장면의 흐름을 따라가는 관객의 특성상 이러한 변주는 집중 대상의 속도에 대해 큰 인상을 남기게끔 도움을 줍니다.
이러한 효과가 가장 드러나는 장면은 판다와 게토의 대결입니다. 해당 장면에서 주시해야할 부분은 판다의 움직임으로 부유하는 잔해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게토의 움직임과 다르게 판다의 속도는 더욱 빠르고 변칙적입니다. 상승(혹은 비상)시에는 느리게 움직이지만 하강시에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판다의 움직임은 관객들로 하여금 판다의 하강에 엄청난 집중을 하게 만듭니다. 실사영화 중에서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 영화로는 <맨 오브 스틸>이 있지만, 가상과 허구라는 인식이 강한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해당 장면이 더욱 위화감없이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추가로 인상깊었던 점은 선 굵기의 다양화였습니다. 보통의 애니메이션들이 특정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사물들의 선 굵기를 통일하는 것과는 다르게 주술회전은 액션시 선의 굵기를 굉장히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대표적으로 격돌하는 주술의 경우에는 선의 굵기가 두껍게, 빠르게 움직이는 인물의 팔과 같은 부분은 선이 굉장히 얇거나 거의 없게 말이죠. 사람은 기본적으로 같은 화면에서 초점이 뚜렷하고 크기가 큰 것에 먼저 눈길이 가게 됩니다. 그리고 선 굵기의 차이는 이런 요소를 적극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술회전의 결투 장면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술의 형태와 격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술의 선 굵기가 다른 것보다 굵은 것은 주술에 관객의 시선을 묶어두기 위함이고 이는 작중에서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원리로 빠르게 움직이고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파트는 굵기를 상당히 얇게 사용하여 대비효과를 극대화하면서도 이질감을 줄입니다.
2. 프리퀄적 특성
제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나는 주술회전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온전히 집중을 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대부분의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이 기존 팬들에게 친숙한 주연 캐릭터들의 여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기인한 생각이었지만, 이 영화는 다소 달랐습니다. 영화의 주연들은 주술회전 본편의 주인공은 아니며, 주술회전 본편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관람에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이런 프리퀄의 특성상 원작의 팬들은 익숙한 캐릭터들의 과거를 본다는 의미로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고, 신규 유입 관객은 부담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설정의 설명에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신규 관객의 입장에서 주술사의 등급이나 저주의 등급이 어느 정도 느낌인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극에서 주요 인물을 맡은 유타, 고죠, 게토라는 세 인물이 모두 특급이라고 설명이 되기에, 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등급의 선정 기준 역시 설명이 빈약했습니다. 허나 이러한 불친절로 인해 저 역시 주술회전의 설정을 조금 찾아봤다는 사실은 이 방식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극장판 <주술회전:0>는 사실 이런저런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액션의 퀄리티는 좋지만, 감정선과 액션의 밀도가 너무 빽빽하여, 여러 에피소드의 결합판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로 인해 무언가 생략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여, 완성도면에서 1쿨 길이의 TVA나 OVA로 나오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의도를 충분히 만족한 좋은 프리퀄 영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