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켄슈타인(2025)> 리뷰
보는 시각에 따라 최초의 영미권 SF 소설로도 불리는 고전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약 2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수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수많은 영화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동명의 1931년작, 1995년작과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2015년작 <빅터 프랑켄슈타인> 등이 있습니다.
허나 해당 영화들은 원작 소설의 팬으로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우선 현대에 이르러서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과 "크리쳐"를 혼용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1931년작 프랑켄슈타인은 영화사적으로 굉장히 가치가 있는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냐 묻는다면 다소 주저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선적으로 "크리쳐"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크리쳐"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각종 시체들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들을 붙여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체입니다. 이에 대해서 1931년작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화는 시체들을 붙여 만든 생명체라는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어 크리쳐를 디자인하였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크리쳐가 기괴하고 거부감이 드는 외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요소를 잘 반영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크리쳐는 기이한 괴물보다는 이 세상에 던져진 갓난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방을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나 단어를 어수룩하지만 따라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고 애정을 원하며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어리숙하지만 순수하고 처량한 존재로 보이도록 말입니다. 이러한 크리쳐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로 "말"을 꼽을 수 있습니다. 크리쳐가 작중에 유의미하게 배운 단어들은 "빅터", "엘리자베스"가 있으며 이후 오두막의 헛간에서 일상적인 언어들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빅터와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느끼기에 자신에게 사랑을 나누어준 존재들의 이름입니다. 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말하는 단어들인 "엄마", "아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갓난아이에게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듯, 크리쳐에게도 빅터가 세상의 전부였기에 그는 빅터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되뇌이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빅터가 건물을 불태우는 장면을 다시 보면 상당히 감회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길 속에서 계속 빅터의 이름을 부르짖는 크리쳐의 모습은 위험한 상황에서 애타게 부모를 애타게 찾는 아이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언어를 배운 헛간에서도 크리쳐가 원한 것은 머리를 토닥여주는 인정과 소속감이었습니다. 그런 소속감과 안정을 나누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 언어를 익히는 크리쳐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절묘하게 나타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또한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은 붉은 색입니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붉은 색은 첫 장면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드레스 색에서 나타나듯 생명과 모성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피, 불길과도 맞닿아있습니다. 이러한 붉은 색의 이중적인 면모는 "죽음에서 비롯된 생명의 탄생"이라는 본작의 핵심을 꿰뚫는 하나의 장치라고도 보입니다. 누군가의 죽음과 그 시신으로 인해 흐른 다수의 피는 작중에선 아이를 낳을 때 흘리는 산모의 피와도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이러한 역설을 작중에서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성질과 결합시켜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본작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현대판 오이디푸스이자 프로메테우스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빅터는 작중 아버지가 부재할 경우 어머니는 오롯이 자신이 독차지한다는 말을 나타내며 노골적인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나타냅니다. 어머니의 색이 붉은 색이고 아버지의 색이 푸른 색으로 나타나는 본작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초래한 윌리엄 프랑켄슈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푸른 옷을 입고 아버지와 웃으며 지내는 와중에도 빅터는 붉은 넥타이를 매고 붉은 장갑을 낀 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온 몸으로 나타냅니다. 또한 그가 작중 수차례 마시는 음료가 다름아닌 우유라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세상에 불을 가져다 준 존재인 프로메테우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는 생명은 신이 주는 것이지만 죽음은 인간이 정복할 수 있는 존재이며 자신은 인류를 위해 죽음을 정복한 존재가 되겠다는 일념하에 움직입니다. 또한 하인리히 하를렌더 역시 그를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하며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평생 당신의 간을 쪼아먹는 독수리가 되어주겠다는 대사를 합니다. 결국 하인리히는 빅터의 독수리가 되지 못했지만 그가 창조한 "크리쳐"는 그의 독수리가 되어 그의 목표가 됨과 동시에 그에게 계속하여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 역시 주목해볼만 합니다.
본작의 결말은 원작의 결말과는 상이하게 마무리 됩니다. 빅터의 죽음을 목격하고 절망에 빠지며 그의 시신을 가지고 사라져버리는 원작과 달리, 본작에서는 빅터가 크리쳐에게 아들이라 부르며 그간의 잘못을 속죄하고 고통뿐인 삶이더라도 계속해서 살아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하며 아름답게 마무리를 짓습니다. 메리 셸리의 원작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본작의 결말이 이러한 형태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소 우려를 했던 저였지만 영화를 직접 본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와 같은 크리쳐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자 엇나간 모든 행동의 원인이 부모로부터의 인정이자 사랑이라면 이러한 결말의 형태가 더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크리쳐"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으로 자주 혼용되어 표기되는 세상에서 빅터가 크리쳐를 자신의 아들이라 부르는 장면은 크리쳐에게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이 부여된다는 의미와도 같으므로 이제는 크리쳐를 프랑켄슈타인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위트 있는 생각이 반영된 결말이라는 생각 역시 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영화의 엔딩에 바이런의 말이 첨부되어 있다는 점이나 원작자 메리 셸리의 남편인 퍼시 셸리의 시 <오지만디아스>를 크리쳐가 낭송하는 장면, 광원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크림전쟁이 진행되던 1857년을 배경으로 하고 크리쳐를 만들어낸 장소는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한 전쟁이 발발한 1795년이 새겨져있는 만큼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의미로 변태적인 취향이 모여 만들어진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OTT로 보는 것도 분명히 좋겠지만 극장에서 상영중일때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은 정말 엄청난 행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모든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판의 미로>와 함께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자 현재까지 영화화된 <프랑켄슈타인> 영화 중 최고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