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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아르헨티나 한인 사장님과 만남

by ANTONI HONG

한국에서 비행기로 갈때 가장 먼 나라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브라질에서도 비행기로 3시간 넘게 더 날아가야 하는 이곳은 의외로 한인 이민자가 중남미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많은 나라이다. (2020년 기준 약 25,000명) 브라질과 함께 과거 70~80년대 이민을 많이 받아들였으며, 한인들은 봉제, 의류 사업을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한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아르헨티나 바이어 발굴을 시도하던 중, 우연히 현지 전자제품 브랜드 P사와 접촉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준 이 회사의 사장님은 뜻밖에도 한국계 교포였다. 그는 7세에 아르헨티나로 이민, 이후 L사 상사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현재의 전자제품 브랜드 P사를 인수해 창업한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P사는 아르헨티나에서 자체 브랜드로 주방 가전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로,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사장님의 초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고, 브라질에서 출발해 처음으로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7월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한창 겨울철이라, 가벼운 자켓만으로는 쌀쌀함이 느껴질 정도로 추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호텔에 체크인하고 직원과 단 몇마디를 나누는 동안 스페인어가 잘 들리지 않는 경험을 했다. 멕시코, 중미 지역 등에서 전혀 문제가 없던 나의 스페인어가 아르헨티나에서 잘 통하지 않을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스페인어의 특별한 악센트는 스페인어를 이태리어 억양으로 하는 느낌인데, 일부 발음은 차이가 너무 커서 아는 단어도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열쇠를 의미하는 Llave 는 '(ㅈ)야-베' 라고 발음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샤-베' 로 발음을 한다. 당시 나는 이러한 차이를 어느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으나, 그 차이가 단순히 발음의 차이 뿐만이 아닌, 억양에도 차이가 있다보니 실제 대화에서는 아주 간단한 단어들 조차도 알아듣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겪은 특별한 경험 중 하나는 그 나라의 환율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여러번의 디폴트와 경제 위기를 겪으며 지속 환율이 불안정하였으며, 특히 나라의 공식 환율과 암달러 시장에서의 환율의 차이가 커서, 실제 은행에서 환전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나 역시도 P 사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공식 환율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환전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고 조심스러웠지만, 현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 결과, 현지 화폐 기준으로 물가가 매우 저렴하게 느껴졌다. 한 끼 식사, 택시, 생필품 구매 등 대부분의 소비가 체감상 반값 이하로 느껴졌고, 여행자 입장에서는 큰 혜택처럼 다가왔다.


출장 중 P 사의 사장님께서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그가 이끈 레스토랑은 외관부터 품격이 느껴지는 고급 레스토랑이었고, 실내 분위기 또한 세련되고 정갈했다. 인상 깊었던 점은 사장님과 셰프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친밀해 보였다는 것이었다. 메뉴판은 보지도 않고, 사장님은 “지난번 그 요리로 부탁한다”며 자연스럽게 주문을 마쳤다.


잠시 후 서빙된 요리는 시각적으로도 완벽했고, 맛 또한 훌륭했다. 하지만 진짜 인상 깊었던 건 사장님의 음식에 대한 설명이었다. 재료, 조리 방식, 이 지역 음식 문화와의 연관성까지 덧붙여 이야기해 주셨고, 덕분에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요리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곁들인 깊은 경험이 되었다. 사장님은 단순한 미식가를 넘어서, 음식과 주방기기의 관계에도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P 사의 주방 가전들은 현지 셰프들과 협업한 마케팅 캠페인을 진행 중이었다.


그 이후로도 아르헨티나 출장에서 사장님의 저녁 초대는 하나의 기대이자 즐거움이 되었다. 단순한 비즈니스 식사를 넘어, 문화적 감각과 인간적인 매력이 묻어나는 시간이었다.


출장 중 시장 조사를 하면서 유통채널에 진열된 제품들의 특이점들이 있었다. 상당수 전자제품들이 최소 10년 이상된 구형 모델들이라는 점이다. 이는 아르헨티나에 전자제품을 수입하는데 있어 많은 제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제품을 수입하려면 일정한 수출 실적이 있는 기업만 허용되었으며, 수출 실적이 없는 기업은 타사의 실적을 구매해 수입을 진행하는 관행도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를 이유로 전자제품의 현지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도 시행 중이었다. 예를 들어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지역에 생산 거점을 두는 업체에게는 세금 감면과 같은 혜택을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기술력이 낮은 구형 제품들이 국내에서 재조립되어 '국산'으로 유통되는 일이 발생하고, 소비자는 고가의 저사양 제품을 구매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생각보다 매우 페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 나라였다. 다른 나라에서 볼수 없는 암달러 환전이 존재하는 부분도 그렇고, 무역수지 적자를 메꾸기 위한 인위적 쿼터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다른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국내 산업 보호라는 명분 아래 운영되지만, 실상은 시장 기능을 왜곡하고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아르헨티나는 시장이 자율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이며, 국가 시스템 자체가 지속적으로 '임시방편적 땜질'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도 특유의 자존심이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때로는 '잘난 체 한다'는 인식을 받기도 하는데, 그 배경에는 유럽 이민의 영향으로 형성된 문화적 우월감과 더불어, 한때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부국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 특히 1913년에 남미 최초로 지하철을 개통하며 눈부신 경제 발전을 자랑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 불릴 만큼 세련된 도시였고, 농산물 수출을 중심으로 유럽과 활발히 교류하며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번영의 이미지는 대중문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일본 애니메이션 '엄마 찾아 삼만리' 에서는 주인공 마르코의 어머니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떠난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그만큼 당시에는 기회의 땅, 풍요의 나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현실은 과거의 영광과는 큰 괴리를 보인다. 만성적인 경제 위기, 하이퍼인플레이션, 외채 문제, 정치 불안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호텔 주변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음식인 아사도(소고기 스테이크)와 현지 와인을 맛보는 소박한 즐거움도 누렸다. 도시의 낭만과 여유를 느끼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혼자 거리를 걷던 중, 지나가던 차량에서 누군가 갑자기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욕설 같은 말을 던졌다. 너무 놀라서 멈칫했는데, 그 운전자는 나를 비웃듯 즐거워하며 계속 조롱했다. 그 순간, 나는 말로만 듣던 ‘인종 차별’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당시 중남미 생활을 5년 넘게 하면서도 처음 겪은 너무나 씁쓸하고 한심한 기억이었다. 물론, 그 경험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처음 겪은 그 경험으로 인해 이후로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갖기 어려워진거 같다.


중남미의 여러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잘난체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어쩌면 아르헨티나라는 나라가 가진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게 전달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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